자유게시판
서로 마음을 열어 고민과 아픔을 나누고 치유하며 행복을 모아내는 게시판입니다.

도올의 금강경 오해 58

일반 조회수 1382 추천수 0 2018.04.22 20:20:11

도올의 금강경 오해 58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13-5. “須菩提! 於意云何? 三千大天世界所有微塵, 是爲多不?”

13-5. “수보리야! 네 뜻이 어떠하뇨?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티끌이 많다하겠느뇨?”

13-6. 須菩提言: “甚多. 世尊!”

13-6.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13-7. “須菩提! 諸微塵如來說非微塵, 是名微塵. 如來說世界非世界, 是名世界.”

13-7. “수보리야! 그 모든 티끌을 여래는 설하기를, 티끌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비로소 티끌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여래는 이 세계가 세계가 아니라고 설파한다. 그래서 비로소 세계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강해] 우리나라의 여타 번역이 바로 이 “是名”의 해석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이미 지적한 바 대로다. 반야의 사상은 근원적으로 우리의 언어의 세계를 부정한다. 그러나 비록 잘못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언어라는 방편이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도 잘 뜯어보면 모순덩어리에 불과하다. 언어 그 자체가 파라독스 그 자체인 것이다. 아무 낙서도 없는 깨끗한 벽에 “낙서금지”라는 불필요한 팻말을 걸어놓은 것과도 같은 근본무명의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금강경은 언어를 “妙有的”으로 긍정한다. 우리는 티끌을 티끌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세계를 세계라 이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여기 ‘於意云何’란 말은 도올이 따른다는 세조언해본의 해석처럼 ‘네 뜻이 어떠하뇨?’란 대도, 또 필자가 해석한 대도 ‘뜻으로 말하면 어떤 것인가?’라고 한 대도, 또 다른 해석이란 대도, 이 ‘뜻’이 무엇을 가르키는 뜻인지를 바르게 알아보아야 한다. 이 ‘뜻’은 지금 말하고 있는 이 말의 뜻을 가르킨 뜻이 아니라, 석가여래가 앞에서 말한 여래법의 뜻으로 지금 말하는 이 말뜻을 이해하자면 어떤 거냐고 묻는 것이다.

석가여래가 13-3에서 여래는 말을 한다면 말을 하는 이 법으로 있는 여래, 곧 보리살타의반야바라밀이라는 법이라고 말했는데, 이 법으로 이 티끌과 같이 많은 삼천대천세계가 실재의 실체로써 많은 거냐고 묻는 것이다.

13-5. “수보리야, 이 뜻의 여래법으로 말하면 이 티끌과 같이 많은 이 삼천대천세계는 이 많은 실재의 실체랄 것이냐?”

13-6. 수보리가 말한다. “엄청 많습니다. 세존부처님.”

수보린 13-4에서의 대답과 같이 석가여래의 말뜻을, 즉 여래인 보리살타의 반야바라밀로서의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이란 말뜻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말을 하는 연기의 실상을 수보리는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삼천대천세계가 되었든, 티끌이 되었든 ‘많다’라는 건 ‘적다’라는 것과의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으로써 ‘많다’ ‘적다’라는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여래로써 보리살타의반야바라밀인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인 것이지 “엄청 많은 것”으로서의 실재의 실체랄 것은 없는 것이다. 이를 수보리가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니 석가여랜 거듭 설명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 설명으로 이를 증명하는 일석이조의 일을 하기는 한다지만, 과연 얼마나 이익이랄 것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헐!

석가여랜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써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을 총체적 인연·인과의 지혜, 곧 반야바라밀로 작동하게 하는 이 금강의 보리살타라는 여래법을 이런저런 크고 작은 존재와 현상을 예로 들어 반복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의 부동태인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은 실제 시·공간적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보리살타의 반야바라밀다라는 이 여래법의 금강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 금강경은, 아니 모든 불교서물뿐만 아니라 불교적인 것들은 온통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이 금강을 설명하여 이 금강을 증명하는 연기의 실상이다.

이 여법수지분도 이를 설명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 설명으로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도올이 저간의 “是名”에 대한 해석이 틀렸다고 하지만 도올의 해석이 오히려 난삽해 틀린 것이랄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이름하여 ~라 한다.’나 도올처럼 길게 ‘비로소 ~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나 의미상 뭔 차이랄 것이 있겠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是’가 어떻게 쓰였느냐이다. 뭘 가르키는 것이라면 뭘 가르키는 것인지, 뭘 긍정한다면 뭘 긍정하는 것인지를 바르게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대체 한문속의 한자는 그 품사를 특정하기가 어려워 바르게 해석하기가 매우 까다롭다. 이렇게 어렵단다고 한문에 무식해 그렇다면 맞는 말이라 대꾸할 수가 없어 뒷통수나 긁적일 밖에 없다. 그러나 석가여래가 언제 어디서 티끌 따위,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을 극단적으로 ‘없다’거나 ‘아니다’라고 부정했다고, 아니 설령 부정했단 대도, 그렇단다고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을 ‘비로소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랄 수 있을 것인가?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서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의 세계는 온통 상대적 인식으로 드러난 관념적 부동태로써 실제 시·공간적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보리살타의 반야바라밀인 여래, 곧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이라는 법이다

13-7. “수보리야, 여래법의 뜻은 모든 티끌이 여래임을 설명하는 것이지, 실재의 실체로서의 티끌이 아닌 것이다. 이 여래로써의 티끌을 티끌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 여래는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지, 실재의 실체랄 세계가 아니다. 이 여래로써의 세계를 세계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우짰든지 ‘시’는 보리살타의반야바라밀인 여래라는 법을 가르키는 말이다. 즉 모든 티끌은 티끌이라는 실재의 실체랄 것이 아니라 티끌로 작동하는 티끌작동성으로써의 여래, 곧 보리살타의 반야바라밀인 여래이므로 ‘이’ 티끌작동성으로써의 여래를 티끌이라고 이름한다는 말이다. 세계라는 것도 이와 같은 所以로써의 세계임을 말하여, 이 삼천대천세계, 곧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의 과거 현재 미래, 곧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모든 성품의 삶이 온통 하나의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보리살타의반야바라밀로써 여래인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임을 석가여랜 설명하여, 이를 아는 진리인식의 깨달음을 기도하는 것이다.

여래인 보리살타의반야바라밀이라는 이 반야사상은 도올이 이해하는 것처럼 ‘근원적으로 우리의 언어의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모든 성품의 삶을 所以로 하여 작동하는 연기의 실상으로써 언어성으로 작동하는 작동성이지 실재의 실체랄 것은 없는 것이다.

도올이 이 언어를 뭔 인간의 삶의 편리한 도구로써의 방편이라고 말하는 건, 언어가 인간의 삶을 所以로 하여 있는 여래의 법임을 말하는 석가여래의 깨달음과는 아득한 오해의 말이다. 더구나 파라독스, 역설로써의 상대적 인식으로 작동하는 이 여래의 법을 ‘아무 낙서도 없는 깨끗한 벽에 “낙서금지”라는 불필요한 팻말을 걸어놓은 것과도 같은 근본무명의 행위’라는 비유로 설명하는 건, 이 말이 뭔 뜻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이는 마치 뭘 모른 이들이 누가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을 ‘무’나 ‘공’으로 표상해 말한단다고 대책없이 사람성품으로 고귀하기 짝이 없는 이 생각이나 아작 내야 뭔 이 ‘무’나 ‘공’으로써의 ‘깨끗한 벽’이 될 거란다고, 사람성품으론 도무지 되도 않는 생각없애기에나 골몰하게 하는 말과 같은 허접한 말이다.

‘반야의 사상’은 파라독스다.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모든 성품의 삶은 상대적 인식으로 드러난 관념적 부동태로써의 파라독스·역설로써, 이 역설로 작동하는 작동성인 보리살타의반야바라밀다이며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인이다.

도올이 이를 말하지 않고 ‘금강경은 언어를 “妙有的”으로 긍정한다. 우리는 티끌을 티끌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세계를 세계라 이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사유하여 말하는 건 전혀 이 금강의 ‘묘유’와는 아득하여 이건 아닌 얼토당토않은 사유의 말을 하는 건, 비록 얼토당토않은 연기의 실상인 금강의 묘유이긴 한다지만, 이는 연기의 실상인 이 금강의 묘유를 바르게 사유하여 말한 말은 아니다. ---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13-8.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見如來不?”

13-8. “수보리야! 네 뜻이 어떠하뇨? 삼십이상으로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뇨?”

---13-8. “수보리야, 여래의 법을 뜻으로 말하면 어떤 것인가? 나를 32상이라고 알아 여래라는데 기냐?” ---

13-9. “不也. 世尊! 不可以三十二相得見如來. 何以故? 如來說三十二相卽是非相, 是名三十二相.”

13-9. “볼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삼십이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가 없나이다. 어째서 그러하오이까?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십이상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삼십이상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오이다.”

--- 13-9. “아닙니다. 세존은 32상으로만 알아 본 여래랄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석가여래로써의 여래는 32상으로 설명되는 것이지 실재의 실체랄 32상의 석가여래랄 수 없습니다. 다만 이 32상으로써의 여래를 32상이라고 이름한 것입니다.” ---

13-10. “須菩提! 若有善男子善女人, 以恒河沙等身命布施, 若復有人於此經中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甚多.”

13-10. “수보리야! 만약 여기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갠지스강의 모래수와 같은 많은 목숨을 다 바쳐 보시를 했다하더라도, 또한 다시 여기 한 사람이 있어 이 경중의 사구게 하나만라도 받아지녀 딴 사람에게 설하였다 한다면 이 사람의 복이 더 많으리라.”

--- 13-10. “수보리야, 보리살타의 반야·지혜는 男의 보리며 女의 살타라는 상대적 인식으로써, 이는 헤아릴 수 없는 항하의 모래들과 같이 많은 몸·身의 보리며 동시에 이 보리로써의 삶인 命의 살타로 펼쳐지고 베풀어져 布施작동하는 작동성으로써 보리살타의 반야바라밀다이다. 이 반야바라밀다인 지혜의 거듭작동을 있게 하는 人으로서의 살타는, 이 반야의 법·경으로 작동중인 사구게 등으로 받아 지녀져 작동중이니, 이 他人으로써의 보리살타반야바라밀이라고 말해지는 이 보리살타에 의한 복인 반야바라밀의 지혜는 엄청난 반야바라밀다인 것이다.”

이 여법수지분은 이 여래의 법이란 대도 이 여래의 법을 설명하는 것으로 실재하는 실체랄 것이 없음은 물론 티끌이며, 이 티끌 같이 많고 또 수많은 항하의 모든 모래 수만큼이나 많은 이 삼천대천세계도, 석가여래의 32상도, 남녀도, 이 남녀로 표상한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써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의 세계는 온통 이 남여로써의 상대적 인식인 관념적 부동태의 형상으로 펼쳐져 있는 몸·身이며, 실제 이 몸·身으로써의 삶인 생멸의 命으로 베풀어지는 身命布施작동으로서의 연기의 실상이라는 이 법을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반야바라밀은 이 반야인 존재와 현상이 존재와 현상으로 거듭 작동하여 쌓이는 세계로써, 이 하나의 반야바라밀의 세계로 작동케 하는 건, 이 身命인 人으로써의 보리살타라는 법에 의한 것이란 것이다. 이 법의 경은 이 법의 경으로 작동 중인 사구게 등의 언어문자로 수지되어, 이 보리살타의반야바라밀이라는 이 법·경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 보리살타에 의한 복으로써의 반야바라밀인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의 세계는 엄청나게 많아 반야바라밀多라고 석가여래는 자기의 상호까지를 거론하며 이 보리살타의 반야바라밀인 여래로써의 연기의 실상이라는 이 법·경을 설명하는 것이다.

원문이든 번역문이든 意義의 義를 格義한 문자이다. 若이란 말이야 당연 지혜의 반야를 격의한 말이다. 善은 보리살타다. 남·여는 보리살타에 의하여 드러나는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으로써의 항하사等인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를 은유한 말이다. 이렇게 단어 하나하나며 문장 등으로 격의, 은유·비유된 사실을 일일이 나열한다면, 이는 온통 보리살타의 반야바라밀, 곧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이라는 말로 도배될 수밖에 없어 노상 같은 말의 반복·중복일 밖에 없다. 이는 마치 수많은 범죄의 사실들을 하나의 법조문으로 단죄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역된 불경이든, 범어 원전이든, 이들을 번역한 우리말, 우리문자이든 말이며 문자의 뜻만을 알아 말하는 건, 이 말이며 문자의 뜻으로 가르키는 석가여래가 깨달은 의취로써의 義를 바르게 알아본 말이 아니다. 어떤 언어문자란 대도 오직 진리의 진실을 표상한 진리의 진실이다.

이를 말하지 않고 ‘반야의 사상은 근원적으로 우리의 언어의 세계를 부정한다.’며 이 언어의 세계로 사는 우리의 삶을 뭔 방편으로써의 ‘묘유적’이라고나 사유하여 말하는 도올은 정법안장열반묘심의 석가여래의 깨달음을 몰라도 한참 모른 말을 하는 보살님이다.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
공지 일반 법륜스님, 정우성, 김제동, 윤미래가 한자리에 image julymind 2018-10-08 320
공지 게시판 글쓰기에 관한 안내입니다 [3] admin 2011-07-08 665945
2460 일반 도올의 금강경 오해 60 seolbongchang 2018-05-04 835
2459 일반 넓고도 높았으니... imagefile yahori 2018-05-02 1769
2458 일반 등꽃? 등꽃 imagefile wonibros 2018-04-30 827
2457 일반 도올의 금강경 오해 59 seolbongchang 2018-04-29 924
» 일반 도올의 금강경 오해 58 seolbongchang 2018-04-22 1382
2455 좋은 글 행복한 사진 영혼과 자아는 같은 것인가 다르나-48 joochang 2018-04-20 1173
2454 일반 평화를 꿈꾸게 하는... imagefile yahori 2018-04-18 1426
2453 일반 도올의 금강경 오해 57 seolbongchang 2018-04-14 1198
2452 [이벤트] 용서 치유명상을 통한 신행의 확장과 전법 imagefile bulkwang 2018-04-13 1478
2451 일반 소중한 보물 imagefile wonibros 2018-04-12 1112
2450 좋은 글 행복한 사진 편견의 대표 작품은 인종차별 인가-47 joochang 2018-04-11 654
2449 일반 저기, 벚꽃이 환하게... imagefile yahori 2018-04-09 898
2448 일반 도올의 금강경 오해 56 seolbongchang 2018-04-08 904
2447 일반 파란하늘과 벚꽃 imagefile wonibros 2018-04-04 1187
2446 좋은 글 행복한 사진 인간의 다양성은 능력이며 창조력 아닌가-46 joochang 2018-04-01 751
2445 일반 도올의 금강경 오해 55 seolbongchang 2018-03-30 822
2444 일반 봄이 좋은 건... imagefile yahori 2018-03-30 1443
2443 일반 도올의 금강경 오해 54 seolbongchang 2018-03-25 1039
2442 일반 도올의 금강경 오해 54 seolbongchang 2018-03-25 1066
2441 좋은 글 행복한 사진 인간의 矛盾은 인간의 한계성-45 joochang 2018-03-25 1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