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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에도 이유가 있다

박미라 2018. 06. 24
조회수 2639 추천수 0


남편의 침묵에 더 이상 개입하지 마세요

화나면 말문 닫는 남편에 쩔쩔매는 결혼 4년 차 주부, “눈치 보다 가슴 답답해 미쳐”


사진18-.jpg »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Q) 결혼 4년 차 주부입니다. 남편의 태도 때문에 연애 기간 포함 5년간 마음을 졸이며 살았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나 예상치 못한 상황들, 마음 상하는 상황, 화나거나 짜증 나는 상황이 되면 남편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 일의 원인 제공자가 저든 아니든 상관없이 모든 상황에서 제게 입을 닫아버립니다. 처음에는 그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풀어주려고 엄청 노력했는데, 그러다 보니 습관이 됐나 봅니다. 가령, 본인이 피곤하게 일을 하고 늦게 집에 들어왔는데 집에 아무것도 먹을 게 없다, 라면도 떨어졌다, 그러면 짜증을 내고 말을 안 합니다. “라면 없어?” 했을 때 제가 “응, 내가 하나 남은 거 먹었어. 지금 사다 줄까?” 하면 아니라며 짜증 내고 말을 안 합니다. 그게 며칠을 갑니다. 그리고 사과하는 법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제가 항상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걸어야 하구요. 화가 풀어진 뒤 왜 그랬는지 물어보면 말을 돌립니다. 지난 추석에 시댁 가는 길에도, 차가 너무 막히니 짜증이 났나 봅니다. 계속 한숨을 쉬며 짜증을 내길래 저는 조용히 있었습니다. 친정에 먼저 가기로 했는데, 그러려니 시댁에 가는 시간이 너무 늦어질 거 같았습니다. 아마도 저희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시댁에 가면 저녁 늦게 도착할 생각에 짜증이 났나 봅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전화해서 시댁에 먼저 가겠다고 하고, 신랑에게 행선지를 바꾸라고 몇 번이나 말했습니다. 대답을 안 하고 한참 있다가 내비를 수정하더군요. 저는 서러워서 눈물이 터졌습니다. 그리고 도착해서 이틀간 제게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밤에 시댁에서 너무 서러워 울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서럽고 억울하다. 차가 막히는데 왜 내게 짜증을 내냐. 무슨 이유냐. 당신이 그러면 내가 얼마나 지옥 같은 시간을 견뎌야 하는지 아느냐 했습니다. 여전히 대답은 없지요. 다음 날 아침 남편을 깨우는데 정말…여섯 살 아이가 자기가 맘에 들지 않는 상황에서 친구를 째려보듯이 저를 째려봅니다. 제가 일으키려 하면 손을 내치고 분노가 가득한 눈으로 저를 째려보더라구요. 저는 그런 상황들을 결혼 내내 수도 없이 견뎠습니다. 또 저는 모든 의사 결정에서 남편 눈치를 보며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혹시 남편이 화내지 않을까? 삐치지 않을까? 매번 이렇게 살다 보니 가슴이 답답해 미칠 것 같습니다. 이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까요? - 도리


A) 물리적으로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도 아닌데 유난히 남편을 조심스러워하고 두려워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아내를 두려워해서 늘 숨죽이고 있거나 도망치고 싶어하는 남편들도 많지요. 아마 이런 부부들은 동동한 배우자 관계이기보다는 아버지와 딸, 또는 어머니와 아들 관계를 재현하고 있는 상태일 겁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아버지 같은 남자, 어머니 같은 여자에 끌려 결혼하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숨 막히는 결혼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과거 부모가 그런 부부관계를 자식들에게 보여줬거나 자신이 무서운 아버지나 어머니 밑에서 자랐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까 어린 시절 자신이 보거나 경험한 것을 자신의 부부관계에서 반복하는 것이지요. 두 번째로는 어릴 적 경험과 상관없이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엄격하고 혹독한 아버지상이나 어머니상을 배우자에게 투사해서 그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희한하게도 우리는 이런 심리적 역동의 짝이 될 사람에게 끌리고 그래서 상대에게 자신의 대역을 무의식적으로 요청한다고 하지요. 무서운 사람을 싫어한다고 말하면서도 엄격한 아버지나 어머니의 모습을 잘 구현해줄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고, 또 배우자에게서 엄부, 엄모의 태도를 이끌어낸다는 것이지요. 반대로 지나치게 부성애와 모성애가 강한 사람들은 배우자를 딸이나 아들처럼 무력한 상대로 만들어버립니다.


도리 님은 어떠세요? 과거 아버지와의 관계는 어땠나요? 또 부모님은 어떤 부부관계를 유지하셨나요? 그토록 마음 졸이게 하는 남편과 결혼하시게 된 이유는요? 그리고 생각해보세요. 연애와 신혼 시절에 도리 님이 어떻게 남편의 침묵에 동조하고 그것을 강화시켰는지 말이지요. 그가 화나서 침묵할 때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쓰는 것, 그의 욕구를 미루어 짐작해서 미리 충족시켜주는 것, 남편 때문에 쩔쩔매고, 남편의 침묵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의 침묵을 부추기고, 말할 기회를 차단하는 일입니다. 심지어 그의 침묵을 신비화하고, 힘을 부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희망적인 것은, 도리 님이 이런 관계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그런 감정을, 당신의 불편함을 계속 얘기해주세요. 지금처럼 6살 아이의 투정쯤으로 바라보세요. 물론 위기감을 느낀 남편이 강하게 저항하겠지만 그것은 새로운 관계, 그러니까 동등한 부부관계로 가기 위한 필연적인 불편감입니다. 남편의 침묵에 더 이상 개입하지 마세요. 대신 그의 침묵을 끈질기게 말없이 버텨보세요. 그가 스스로 어른스럽게 입을 열게 될 때까지 말이지요.


거리를 두고 그를 지켜보면서 왜 자주 삐치고 침묵하는지 이유도 찾아보세요. 추측건대 남편에게는 뿌리 깊은 두려움과 망설임이 있을 겁니다. 자신의 욕구를 말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화가 폭발하는 것에 대한, 싸움으로 비화될 것에 대한, 언쟁에서 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대한, 남자답지 못하다는 평가에 대한, 더 나아가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과 그로 인한 망설임 말이지요. 어쩌면 침묵이 가장 좋은 자기보호라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있었을 수도 있고요.


침묵의 사연에 대해 정확히 알면 알수록 그에게 느꼈던 모호한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두려움이 사라지면 그때 비로소 당신은 남편 앞에 당당하고 동등한 배우자로 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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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라
심신통합치유학 박사다.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편집장, <여자와닷컴> 콘텐츠팀장을 지냈고, 마음치유학교에서 ‘치유하는 글쓰기’ 프로그램을 안내중이다. <천만번 괜찮아>, <치유하는 글쓰기>, <완벽하지않아도 괜찮아>등의 저서가 있다.
이메일 : blessm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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