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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살려낸 것들 5 - 오일장

일반 조회수 8474 추천수 0 2009.02.19 02:48:18
시골 장날은, 다들 자기 땅에 코박고 뭇 생명들과 지지고볶고 씨름하다 닷새만에 세상구경 나오는 날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장에 나와 듣고, 그래서 만세운동도 장에서 일어났겠지요. 여기저기 다녀보면 한귀퉁이에 독립만세운동기념탑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는 장터가 보입니다. 장터는 주기적으로 열리는 '아고라'였던 셈이지요.
옛날에는 장에 나와야 전기수가 들려주는 [춘향전]도 듣고 [흥부가]도 들었겠지요. 소리는 장터에서 들어야 제맛일 텐데요, 거창한 무대시설을 갖춘 공연장에서 판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이게 아닌데 싶어집니다. 소리꾼은 소리 하다 애가 빽빽 울면 애 얼르는 소리도 했을 것이고, 이빨 빠진 할아버지 웃음도 참견했을 듯합니다. 구경꾼은 구경꾼대로 "조오타!" "잘헌다!" 추임새도 넣었을 것이고, 흥이 나면 일어나서 어깨춤도 추었을 것입니다. 지금 공연장에서 소리꾼은 소리꾼대로 외로울 것 같습니다. 관객은 또 의자에 손발이 묶인 채 잘해야 박수나 치고 앉았어야 합니다. 흥과 신명이 결박당한 느낌이지요.
아무튼, 대보름 지나 온땅에 축축한 기운이 도는 장날이면 마치 겨울잠 자고 일어난 사람들이 모두 다시 만난 것처럼 활기가 넘칩니다. 이제 한해 농사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거름준비며, 망가진 농기구 손질이며 장 볼 일이 많아지는 것이지요.
도시의 가게에서는 물건값 물어보고 그냥 나오는 손님 뒤통수가 위험천만해 보입니다. 얼굴들이 살벌하지요. 그러나 시골 장에서는 물건을 사건 안 사건 그저 반갑기만 합니다. 오고가며 만나는 사람 인사하고 안부 묻다 보면 그저 신이 나게 됩니다. 축제가 따로 없지요. 못난 놈들은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온다고,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일수록 그저 웃을 일이 많습니다.
 
학 학년 학생수 25명인 작은 대안학교가 근처에 생겼습니다. 어차피 이땅에서 나고 배우고 살아온 교사와 학부형들의 습성과 사회적 한계로 인해 말이 대안이지 아직까지도 전혀 대안을 찾고 있다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기존의 학교보다는 훨씬 아이들이 행복해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우선은 다행입니다. 기존 학교에 조금이라도 자극을 주는 역할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의미가 있다 할 것입니다.
그 고등학교 '문학' 과목 수업을 맡았습니다. 세 시간 연강으로 시간표를 잡아놓고, 수업 시간이 되면 열 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을 무조건 끌고 나왔습니다. 논개 생가로, 폐허가 된 용담댐 수몰예정지로, 울력하여 지붕에 흙을 얹고 있는 집 짓는 현장으로...... 봐야 느끼고, 느껴야 읽든지 쓰든지 하겠지요. 
하루는 장터가 교실이었습니다. 오고가며 물건도 사고 구경도 하던 장인데, 오늘은 글을 쓰기 위해 취재를 하기로 한 것입니다. 학생들이 그 수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얼마나 집중하고 어떤 눈으로 볼지 궁금해집니다.
역시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을 장터에 풀어놓자 처음에는 좀 어색해 하는 듯하더니, 이내 축제와도 같은 장터 분위기에 자신들도 모르게 입이 자꾸 양쪽으로 올라갑니다.
형편 되는 대로 이웃하고 들어선 좁고 천장 낮은 이런저런 가게들이 이마를 맞대고 이어져 있습니다. 아이들의 눈길을 가장 강렬하게 끄는 곳은 튀밥 튀어주는 곳과 대장간입니다.
"뻥이요오--"
"애 가진 각시 애 떨어질까 겁난게 멀리 떨어지시고오--"
"심장 약한 아짐도 한참 내빼시고오--"
"기운 없는 함씨도 좀 있다 오시요오--"
"뻥이요오-- 뻥"
유난히 얼굴이 까만 뻥튀기 아저씨의 경보입니다. 불 위를 열심히 돌던 한 깡통의 옥수수가 "펑!" 소리와 함께 검고 긴 푸대로 튀겨 나가더니 김을 모락모락 올리며 한 자루 가득 쏟아져 나옵니다. 아이들은 깜짝 놀라 가슴에 손이 갔다가 금방 깔깔깔 까르르르 웃어댑니다. 옥수수 튀기러 온 할머니는 인심도 좋게 아이들에게 튀밥 한 바구니를 내놓으십니다. 아이들 입이 더 찢어집니다.
나이가 꽤 들어보이는 성냥간(대장간) 아저씨는 아직 쌀쌀한 날씨인데도 반소매 웃도리를 걸치고 땀을 뻘뻘 흘립니다. 화로에서는 벌건 불이 이글거리고, 불에 들어갔다 나온 쇳조각도 벌겋고, 아저씨 얼굴도 벌겋습니다. 아저씨는 벌건 쇳조각이 금방 식을새라 왼손에 든 집게로 쇳조각을 붙들고 오른손으로는 망치로 부지런히 두드려줍니다.
왼손, 오른손, 아저씨의 손놀림에 따라 작은 쇳조각은 호미로도 되어가고, 낫으로도 되어갑니다. 쇳조각을 다시 찬물에 잠깐 담그자 비명같은 소리를 내며 김을 피워냅니다. 아저씨는 얼른 도로 판에 올려놓고 열심히 두드려댑니다. 그렇게 몇 차례의 담금질과 날을 벼리는 작업이 끝나자 아저씨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번집니다. 다 만들어졌나 봅니다. 준비해놓은 나무자루에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호미꽁지를 밀어넣습니다. 동그랗게 깎여 있는 나무는 이제 제 살을 태워 자리를 만들어주고 호미와 한몸이 됩니다.
아이들은 호미 하나, 낫 하나 만드는 데 걸리는 삼사십분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그 과정을 지켜봅니다. 표정이 진지합니다. 한 아이가 아저씨에게 인터뷰 비슷하게 말을 겁니다.
"아저씨, 힘들지 않으세요? 기계로 만들어도 될 걸 이렇게 힘들게 손수 만드세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돈도 안되고 힘만 든다고 이런 일 안할라고 해. 하지만 우리는 낫이고 호미고 칼이고 전부 이렇게 만들어서 썼제. 아, 언제 테레비에서도 보니까 독일인가 하는 나라에서는 아무리 공장에서 그런 걸 만들어도, 대장간은 대장간대로 있다던디..... 아, 이렇게 두들겨서 만든 것에 비하믄 공장에서 만든 것은 칼도 아니제. 우리나라에서도 젊은 사람들이 좀 이런 것도 하고 그래야 쓸 것인디...... 돈이 돼야 이런 일을 하제."
아이들 표정에도 안타까움이 스칩니다.
"아, 글고 농사 짓는 양반들, 호미고 괭이고 쓰다가 자루 부러지고 날 망가지면 전부 성냥간 와서 고쳐 갖고 가서 쓰는디, 나 같은 사람 없으믄 그 양반들 어째? 멀쩡한 거 날 좀 휘어졌다고 새로 사야 쓸 거 아녀?"
아이들의 얼굴에 감동의 빛이 번집니다. 마음 착한 사람은 아이들이 더 잘 알아봅니다. 오랜만에 대장간 아저씨는 신이 났습니다.
장터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아이들 표정이 좋습니다. 좁쌀 한 되박, 쥐눈이콩 한 되박 담아 파는 아주머니며, 집에서 뜯어가지고 나온 듯한 돌나물 한 바구니, 불미나리 한 묶음을 사과 상자 위에 놓고 파는 할머니...  새삼스럽게 장터를 둘러보고 있습니다. 아이들 반응이 기대 이상입니다. 계획대로라면 한 시간 반 정도 장터를 둘러보고 교실에 들어가 글쓰기를 할 예정이었는데, 이 정도라면 장터에서 빠질 수 없는 곳, 그곳을 데려가야겠습니다. 그곳을 가지 않으면 장터를 다 보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장날에만 문을 여는 막걸리집입니다.
고등학생쯤 되면 아이들 대부분은 술을 마셔본 적이 있습니다. 몇몇은 즐겨 마시기도 합니다. 다만 학생 신분으로 공식 허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술은 늘 숨어서 마십니다. 술집은 대개 음침하고 안주값도 비쌉니다.
장터의 막걸리집. 선생이 따라주는 막걸리잔을 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이들 표정이 묘해집니다. 옆자리에 앉으신 어르신들이 아이들 마음을 풀어줍니다.
"막걸리가 뭔 술이여! 일하다 배고프면 한 잔, 갈증 나도 한 잔, 힘들어도 한 잔, 그런 것이 막걸리여."
"와아! 오늘 이 집이 아조 호강했네. 젊은 총각, 각시들이 이래 가득 들어찼으니....."
"크크-- 총각이래."
"히히-- 각시래."
아이들 얼굴에도 장난기가 돕니다. 아이들은 그제서야 막걸리집의 여기저기를 눈여겨 봅니다. 한귀퉁이에 쌓여 있는 연탄, 도라무통으로 만들어진 식탁, 그 위에 놓이는 푸짐하기 짝이 없는 공짜 안주, 김치, 콩나물, 순대국..... 그러고도 주모 아짐은 조리대에서 금방 만든 음식들을 맛보라고 쉴새없이 건네줍니다. 아이들 평생(?) 이렇게 환영받는 술자리는 처음인 듯합니다. 아이들이 기왕에 술을 마실거면 이런 데서 이렇게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날 장터 수업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왜냐면 다음 주에 써온 아이들의 글에는 그날의 장터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막걸리집이 압권이었다고 다들 썼습니다.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 우리가 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이곳에 왔을 때, 이 모습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바람은, 우려였던 것인지, 그 뒤 3년도 되지 않아 그 정답고 아기자기한 장터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나랏일 하는 사람들 눈에는 그 '정답고 아기자기한' 장터가 지저분하고 낙후된 곳이었답니다. 장터 개량사업을 한다고 한꺼번에 쓸어버리고 또 한꺼번에 높다랗고 깨끗한, 그러나 썰렁하기 짝이 없는 건물과 장터를 세워 주었습니다.
희한한 것은 새 시장 건물에 입주한 가게들 말고는 장꾼들이 새 장터에는 잘 들어가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넓고 깨끗한 새 시장을 두고 한사코 어수선하고 복잡한 길바닥으로 물건들을 가지고 나옵니다. 장 보러 온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월이 가면 좀 나아질까요? 사람들이 켜켜이 쌓아놓은 훈김도, 형편따라 사연따라 이웃하던 수많은 이야기도, 못난 대로 웃음 웃던 너그러움도...... 세월이 쌓이면 도로 쌓일 수 있을까요? 
나라가 돈이 너무 많아 탈이다 싶습니다. 돈이 너무 많아서 한꺼번에 쓸고 한꺼번에 짓고...... 세금을 내지 않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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