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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살려낸 것들 6 - 시골아짐

일반 조회수 7665 추천수 0 2009.02.21 21:45:51
서울살이 이십년 만에, 이러다가는 죽겠구나 싶은 순간이 왔습니다. 시간과 돈이 허락하는 한 주말이면 산으로 들로 서울을 빠져 나갔으나, 그나마도 안 되면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다녀오곤 했습니다. 땅이 아니라 돈으로 여겨지는 서울 근교의 땅덩어리들. 그래도 사람 손이 덜 닿는 곳이면 어디든 잡풀은 열심히 자라나 주었습니다. 이파리, 풀대 아무렇게나 무성하게 뒤엉켜 있는 풀섶을 보면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주루룩 흘렀습니다.
아! 저 풀들하고 같이 살아야 내가 살겠구나, 아침햇살을 받으며 마당에서 세수를 하고 하루를 시작하면 내가 도로 살아나겠구나,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전세 빼고 빚 갚고 서울살이 이십년, 손에 남은 것이 한심합니다. 그것 쥐고 무조건 시골로 가기로 합니다. 물론 본능적인 더듬이로 여기저기 보고들으며 나도 모르게 가서 살 만한 곳을 가늠해보고 있었지요. 인연이다 싶으면 따질 것이 없습니다.
산 좋고 물 좋은 산골짜기 마을입니다. 싸디싼 땅 오백평 마련하고, 빈 집 얻어 아들과 함께 생전 처음 시골살이를 시작합니다. 그후 십년이 넘은 세월 동안 시골에 온 것을 단 한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자라나는 아들은 자꾸만 서울식으로 살고 싶어해서 갈등이 조금 있습니다.
아들을 보면서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시골 처음 올 때 아들 나이가 아홉 살이었는데, 그때는 조금 늦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생각이라는 것을 시작하기 전, 말하자면 본능과 감각으로 세상 만물과 관계맺는, 되도록 어린 나이에 흙으로 데려왔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아들은 나에게 늘 숙제를 내줍니다. 도시살이를 좀 잊어도 좋겠다 싶은데, 아들이 늘 도시살이를 떠올려 줍니다. 아들을 구하려면(?) 도시를 구해야 하고, 아들을 이해하려면 세상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들은 내 아들이 아니라, 세상의 아들입니다. 그러나마나 이건 순전히 에미의 생각일 뿐이고, 아들의 영혼은 이승에서 걸어야 할 또 다른 여정이 있겠지요.
 
머리로 따지지 않고, 몸이 시키는 대로 하기를 정말 잘했습니다. 하루하루 몸과 마음이 살아납니다. 나를 살려낸 것들을 꼽으라면 아침의 새소리, 상큼한 봄바람, 그속에서 한정없이 앉아 해바라기 하는 투명한 햇살, 가지 끝에 붙어 있던 움마다 터져 나오는 새순, 아아!  한꺼번에 숲에서 살아나는 연둣빛 어린 잎...... 이건 봄 얘기고, 여름 가을 겨울... 눈 뜨는 아침마다, 아니 날이 갈수록, 들여다볼수록 놀랍고 신비한 세상! 아, 세상은 원래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를 살려낸 것이 있다면, 그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동네 아짐들의 웃음이었습니다. 내 한몸 그분들에게 얹혀져 득볼 것 하나 없을 텐데, 그분들, 젊은사람이 살러 와준 것만도 고맙다 하십니다.
첫해입니다. 조금 투명해진 햇살이 쏟아지는 늦여름, 아직 한낮에는 땡볕이어서 시멘트 포장된 농로 따라 개울쪽으로 내려가는데 땀이 쏟아집니다. 오른쪽으로 고추밭에 움직임이 있습니다. 고춧대 사이 고랑에 허리를 잔득 구부리고 고추를 따고 있는 아짐의 궁둥이입니다. 아이고! 날이 이렇게나 뜨거운데.....
"안녕하세요?"
풀잎들도 지쳐 늘어지고 산새들도 지쳐 고요한 한낮, 고추따기 삼매경에 빠진 아짐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봅니다.
"아! 애기 엄마! ... 히이!"
그 순간, 세상에나! 태어나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웃음을 보았습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을 혼자서만 가지고 놀다가 남한테 들킨 것 같은 표정이었습니다. 그 아짐이 따고 있는 것이 고추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아마 무슨 금은보화를 줍다가 들켰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도 환하고 빛나는, 새색시처럼 붉게 부끄러운 아아!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나는 그만, 아아 이제 나는 살았다 싶었습니다. 내 몸과 마음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더께가 한꺼풀 툭 떨어져나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지금도 확신합니다. 그 아짐의 그 웃음이 나를 여지없이 살려낸 것이라고. 숲이, 바람이, 햇살이 나를 살려낸 것처럼 그 아짐의 그 웃음은 아무런 선의 의지도 없이 그냥 그 존재 자체로 사람을 살려놓았습니다. 공기나 물처럼 늘 우리 곁에 있어서 그 소중함을 잊고 살지만 사실 세상은 그 어떤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보다 그런 존재의 힘으로 굴러가고 있을 것입니다.
 
기왕 은인들을 챙기자니 빼뜨리면 안될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바로 장터 아짐들입니다.
뭐 눈에는 뭐밖에 안 보인다고, 장에 가면 늘상 눈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것 팔아서 하루 일당이나 될까 싶을 만큼 집에서 키운 푸성귀 몇 단, 고추 몇 바구니 좌판에 올려놓은 장꾼들입니다. 그래도 장이면 장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십니다. 나는 내 농사 망친 거나 내 밭에 없는 것들은 꼭 그런 분들한테 가서 사게 됩니다.
"아이고, 날도 궂은디 오늘도 나오셨네요."
"잉, 나왔는가? 날이 궂으나 마나 영감도 없는디 혼자서 집에 앉았으믄 뭐혀? 장에라도 나와야 사람 귀경도 하고 바람도 쐬고 허제."
"많이 파셨어요?"
"잉! 인자 파장이여. 남은 건 나도 집에 가서 반찬 허제, 뭐. 흠흠-- 막걸리 한 잔 할랑가?"
파장 무렵에 막걸리 한 잔 하는 것이 그중 최고의 낙인 아짐, 술동무 만났다 싶어서 나를 꼬드깁니다. 마다할 리 없죠. 그렇게 되면 그만그만한 장꾼 아짐들 또 이래저래 다 모입니다. 장터 국밥집입니다. 주모 아짐은 크나큰 양푼에 밥이며 나물이며 고추장이며 참기름이며 박박 비벼 내오십니다. 입가가 벌겋도록 입이 찢어져라 한 입 쑤셔 넣기 전에! 막걸리부터 한 잔, 캬! 기가 막히게 좋습니다.
그런데 고약스러운 것은 나에게 막걸리값 낼 기회를 단 한번도 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아짐들은 나한테 술 먹이는 재미가 또 한 재미였나 봅니다. 나는 그 장꾼아짐들에게 늘 우정 비슷한 것을 느끼며 술동무를 하곤 했습니다.
그분들이 나에게 멕인 막걸리 때문에 나는 흥이 돌고 신명이 돌아 제대로 살아나기 시작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입니다.  
가진 것 많은 사람들은 죽었다 깨나도 알지 못할 맛 중의 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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