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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벽에 그린 아그니 신 앞에 선 <마하바라타> 번역자 박경숙씨. “구전문학인 <마하바라타>는 텍스트가 일관성이 없어, 맥락을 설명하는 주해를 상세히 달고, 매끄럽게 번역문을 다듬는 것이 어려웠다”고 했다.

<마하바라따 1~5>
박경숙 옮김/새물결·각 권 2만2000~2만7000원

“이거 고교생 큰딸 두레가 아궁이 벽에 그린 겁니다. 솜씨가 어때요?”

지리산 기슭의 농가 집 벽에 그려진 불의 신 ‘아그니’ 앞에서 그는 털털한 웃음을 터뜨렸다. 지리산에 온 지 5년째라는 인도 고전 문헌 연구자 박경숙(49)씨는 수더분한 시골 아줌마 같았다. 옆을 따라다니는 작은딸 두메(15·중3)와는 인도 고전 구절들을 소재로 삼아 줄곧 농담을 주고받는다.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장항리. 박씨의 집은 실상사 들머리에 자리잡은 ‘노루목’ 마을에 있다. 멀리 천왕봉과 반야봉, 뱀사골 계곡이 아스라이 보이는 거처에서 나물 캐고 고추 농사를 짓는 그는 최근 국내 학계를 놀라게 하는 성과물을 내놓았다. 세계 최고 최대의 전쟁 서사시로 꼽히는 고대 인도의 고전명작 <마하바라타>를 세계 3번째로 완역하고 전체 20권 분량 가운데 1차분 5권을 <마하바라따 1~5>라는 제목으로 내놓은 것이다.

고대 인도 바라타 왕족 사촌 형제들 무리인 ‘판다와’와 ‘카우라와’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 전쟁담을 뼈대로 하는 전체 18장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원본은 어렵기로 악명 높은 고대 산스크리트어로 쓰여 있다. 약 10만개의 시구로 이뤄진 운문체 원본을 20여년 동안 우리말로 풀어 옮긴 번역 초고 물량만 에이(A)4 용지로 5만여장이다. 방바닥부터 쌓으면 천장까지 올라갈 정도다. 21년 전인 1991년 인도 푸네대학에 유학 가서 틈틈이 시작한 번역 초고 작업은 이미 2007년 끝냈다고 한다. 이 산고의 기간 동안 그는 인도의학을 연구하던 남편과 현지에서 만나 결혼해 두 딸을 낳았고, 푸네대학에서 인도 신에 대한 산스크리트·팔리어 고전 연구로 박사학위(2007년)를 받았으며, 그 직후 귀농해 농부가 됐다. 완역본은 인도(현대어)와 미국(영어)에서만 나온 <마하바라타>를 우리말로 풀어낸 박씨의 이력이 궁금해 지난 10일 그의 집을 찾았다. 박씨와의 대화는 <마하바라타>의 장강 같은 서사처럼 꼬리를 물고 거듭되는 인도 고전 이야기의 성찬이었다.

<마하바라따 1~5> 박경숙 옮김/새물결·각 권 2만2000~2만7000원

산스크리트어 원본 완역 결실
“텍스트 너무 재미있어 끌렸죠
어려운 문제 풀릴때 희열느껴”

“왜 번역했냐구요? 원래 제가 싫은 거 안 해요. 사실 텍스트 자체가 너무 재미있어서 시작한 겁니다. <마하바라타>는 이 드넓은 세상 자체니까요. 유학 가서 원문을 보니까, 중국의 고전 <삼국지>와 아주 비슷해요. 주인공들 성격도 그렇고. 같이 비교해서 보면 참 흥미롭겠다 싶더라구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 모습을 이 대작에서 투영해봤으면하는 생각도 했지요. ”

서양의 고전 서사시 <일리아드><오디세이>를 합친 것의 8배나 되는 분량을 옮기는 과정은 분명 고통과 인내가 요구되는 과정이었을 터다. 그런데도 “그런 적은 정말 거짓말처럼 없었다”며, 되레 “게으른 사람이 하기에 딱 좋다”고 그는 웃었다. “저처럼 한꺼번에 여러가지 사고를 못하는 사람한테는 낮엔 농사일하고 틈나는 대로 번역하는 일이 좋아요. 스스로 숱한 인간군상들의 생각과 음모, 행동들이 출몰하는 텍스트에 빠져들었죠. 아, 대단하다. 어떻게 이런 생각, 이런 묘사를 할까. 제 번역이 문장으로 이어지고 문법이 굉장히 어려운 텍스트가 풀렸을 때의 희열 같은 것들이죠. 사실 원전이 길기 때문에 일이 계속 있잖아요. 하염없이….”

<마하바라타>의 진정한 가치는 집착하는 교훈이 없다는 데서 나온다고 그는 일러준다. 전쟁을 벌이는 무사 아르주나 같은 판다와 형제들과 적수인 두료다나를 비롯한 카우라와 형제들이나 그 과정에 개입하는 크리슈나를 비롯한 여러 신들, 반인신, 아수라·락샤사(악귀), 성자들의 행동과 생각들은 세속적 인간들과 거의 똑같다. 선악과 흑백 논리가 없다는 말이었다.

얼핏 신들의 아들인 판다와 형제가 선의 세력이고, 그들을 노름에서 이겨 숲으로 쫓아내고 나중에 전쟁을 벌이는 카우라와 형제가 악의 세력처럼 묘사되지만, 실제 전쟁에서는 판다와 쪽이 신과 공모해 야비하고 음흉한 전술을 밥 먹듯 구사하는 모습이 숱하게 묘사된다는 점도 그렇다. 박씨는 “신이나 성자들도 극악무도하고 속세에 찌든 캐릭터가 많이 등장한다”며 그 단적인 예로 판다와 형제의 용맹한 화살 장수 아르주나를 이끌어주는 지혜의 신 크리슈나를 들었다.

“인도 사상의 진수를 담은 <바가바드기타>의 원전이 된 <마하바라타> 6장에서 크리슈나는 동족을 죽여야 하는 현실 앞에 번민하는 아르주나에게 ‘전쟁을 해야 하는 너의 다르마(의무·도리·법이란 뜻)에 충실하라’고 채근하며, 살육을 부추기지요. 카우라와 형제들을 이기려고 갖은 비열한 술법과 책략을 부립니다. 유명한 <바가바드기타>덕분에 성스러운 신으로 알려진 크리슈나의 본모습은 너무 달라요. 여자들을 유혹해 무려 1만6000명의 부인을 두었던 호색한이기도 하고요. 신들의 제왕 인드라신도 성자들이 지위를 빼앗을까봐 요정 압사라스를 시켜 미인계로 그들을 파계시키곤 하죠.”

속세에 찌든 캐릭터 많이 등장
선악과 흑백논리 없는게 특이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별세계”

“<마하바라타>의 내용들은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는 지금 한국인들에게도 삶의 다양한 갈래와 가능성들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는 게 그의 말이다. 또 하나 강조한 건 ‘이야기의 재미’였다. <마하바라타>에는 ‘날탄’(미사일)과 핵전쟁에 비견될 만한 암흑세상의 진언, 비행기와 탱크·장갑차에 해당하는 기기묘묘한 전쟁 무기들이 수시로 등장한다. 바라타 왕족의 모태가 된 여인 샤쿤달라의 보석반지 연애담, 그리스 신화를 압도하는 신들의 투쟁담 같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쳐진다. 그는 “상투적 수식어나 복잡한 인명 등의 잔가지를 쳐내면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별세계를 접할 수 있다”며 “이 서사시가 ‘포켓몬’ 게임이나 숱한 할리우드·인도 영화들의 모티브가 된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처음 유학을 결행한 것은 대학 시절 어느 스님에게 들은 인간 붓다의 매력을 제대로 이야기로 풀어보고 싶다는 소망 때문이었다고 한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도에서 두 딸까지 키우면서, 고대 산스크리트 고문헌들과 씨름한 끝에 <마하바라타>의 산맥을 넘었지만, 내처 인연의 힘으로 풀려나간 자신의 학문 역정은 언제나 물 흐르듯 편안했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박씨는 초역은 했지만, 어려운 용어나 인명들을 우리말로 다듬어 풀어내는 완역본 발간까지는 앞으로도 최소한 4~5년은 잡아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일단 내년까지 10권을 출간해 숨고르기를 한 뒤 해석이 가장 난해하다는 12장 ‘평화’와 13장 ‘교훈’을 포함해 판다와 형제들이 승전 뒤 출가수행을 떠나는 나머지 부분에 도전할 참이다. “언제까지라고 목표를 세우진 않았어요. 그렇게 하면 농사짓는 재미를 뺏기니까….”

남원/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판다와 군과 카우라와 군의 마상전차 전투를 그린 인도의 세밀화. 도판 제공 새물결

인도 고전 ‘마하바라타’는

기원전 10세기 전쟁실화담 모태
신과 성자·악귀 골육상쟁 얘기
인도의 사상과 우주관 녹아들어

‘위대한 바라타(고대 인도의 왕족 이름)인들의 이야기’란 뜻을 지닌 <마하바라타>는 ‘신화의 밀림’이자 ‘이야기의 아마존’이다. 인도인의 정신과 사상, 지식과 지혜, 신화와 전설, 윤리관과 우주관 등 그들의 역사와 문화에 얽힌 모든 것들이 잡탕처럼 이 고전에는 녹아들어 있다. 10만개의 시구에 등장하는 인명도 3000개에 육박한다. 4세기께 위야사라는 고대 선인이 최종 편집했다고 전하지만, 위야사가 ‘편집인’이란 보통명사로도 쓰여, 실제로는 문학을 담당했던 계급인 브라만들과 민중의 구전담이 1000년 이상 축적된 결과로 본다. 따라서 이 대작을 읽는 것은 나름 인내도 필요하지만, 어떤 형식으로 특정되는 작품이 아니기에 복잡하고 다채로운 구성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독해의 지름길이다.

<마하바라타>의 구성은 장강 대하와 그 언저리의 숱한 지류들에 비유할 수 있다. 기원전 10세기께 전쟁 실화담을 모태로 하여 엄청난 수의 신과 성자, 반인신, 악귀 등이 북인도 대륙을 무대로 삼아 출몰하며 펼치는 골육상쟁의 전쟁 이야기가 본류에 해당한다. 여기에 고대 창조신화와 대홍수, 불로불사의 영약을 얻기 위한 신들과 아수라의 줄다리기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류들이 가지처럼 얽혀서 거대한 서사를 이룬다. 내용 전개 또한 이야기 속에 이야기들이 거듭 나타나면서 펼쳐지는 얼개다.

원문에서는 모두 18장의 서사시를 가객 우그쉬라와스와 위야사의 제자인 브라만 와이샴파야나, 그리고 전쟁에 패한 카우라와 일족의 왕 드르타라슈트라의 측근 산자야가 화자로 나서 시 형식의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원문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5장(이번 1차 번역본은 1~3장까지를 다룬다)은 태초 세상의 창조, 전쟁 대결을 벌이는 판다와·카우라와 형제들의 탄생과 성장, 노름(내기)에서 비롯된 두 형제 간의 갈등 과정을 다룬다. 6~11장은 전쟁의 진행과 판다와의 승리로 끝나는 비참한 전쟁 상황이 핍진하게 묘사된다. 12장 ‘평화’와 13장 ‘교훈’, 14장 ‘말희생제’는 <마하바라타>의 핵심 사상을 담고 있는 장이다. 전쟁에 이겼지만, 일가친척을 살해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판다와의 유디슈티라 왕에게 성자 비슈마가 역경과 해탈의 도, 궁극의 진리를 일러주는 내용이다. 마지막 15~18장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왕국과 판다와들이 출가수행을 떠나 마음을 다스리는 이야기다.

간디와 함석헌의 주해로 유명한 <바가바드기타>는 <마하바라타>의 6장 ‘비슈마’에 있는 철학적·종교적 시구들을 간추린 것으로, 전쟁터에서 동족의 살상에 번민하는 판다와족 전사 아르주나에게 수호신 크리슈나가 던지는 지혜의 잠언 등이 담겨 있다. 흔히들 <바가바드기타>를 인도 고대 사상의 정수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절반만 맞는 말이다.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은 12, 13장을 핵심으로 간주하며 지금도 해석을 놓고 논란을 벌이고 있다. 번역자 박경숙씨도 앞으로 진행될 전작 완역본 출간 과정에서 가장 험난한 산으로 꼽은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문외한인 독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2권 말미 부록에 실린 해설을 먼저 보고, 전체 내용을 이해한 뒤 흥미로운 전쟁담이나 신화 등의 구절을 취향대로 골라 읽는 것이 좋겠다. <마하바라타>가 기승전결로 설명할 수 없는 온갖 명상과 사고·일화 등이 뒤섞여든 이야기의 거대한 그물망이기 때문이다. “<마하바라타>에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인도인들의 경구가 이런 배경에서 나온 말이다. 사실 이 거작의 구성 자체가 온갖 망상과 잡념, 환상과 욕망에 가위눌리고 유혹당하는 복잡무쌍하고 불가사의한 인간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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