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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기독교(6)
말씀이신 하나님, 말(씀)많은 목사
 

F는 기독교인이다. 그는 현직 목사이며, 그의 출신지가 아닌 곳으로 이주해서 아담한 크기의 교회에서 담임목회를 하고 있다. 일반대학을 졸업한 이후 늦깎이로 신학에 입문하였지만 이 길에 접어든 게 벌써 30년에 가깝다. 그는 천성이 착한 편이고, 대인관계도 원만하며, 성직자로서는 알천이 될 만한 미덕으로서 별반 물욕이 없는 게 큰 장점이다. 돈 밝히는 세속처럼 돈 밝히는 목사가 얼마나 많던가! 그들의 설교란 걸 듣고 있으면, 차마 하나님마저 돈을 밝힌다. 한때 이 종교는 제법 세상도 밝혔건만!
그는 진중하거나 꼼꼼하기보다는 덤벙거리거나 더러 실없는 호기를 부리기도 하는 타입이다. 그런 탓인지, 그 지역의 텃세밭을 이루는 노인들이나 다소 보수적인 성향의 교인들이 그를 일러 ‘경솔하다’고 했고, 그와 정치적·목회적 견해차로 버성긴 이들은 심지어 ‘천방지축마골피’라는 천년 묵은 논리를 끌어와선 ‘역시 쌍(상)놈은 할 수 없어!’라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뱉곤 했다. 이러한 비난에는 내 지기 중의 일부도 앞뒤를 재지 않고 동조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F와의 사적 연분과 의리를 떠올리면서 그를 두둔하거나 변명하고, 때론 하릴없이 뼛성을 부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말버릇만은, 참 어쩔 수가 없었다. 특히 개신교 목사들 중에 그런 이들이 적지 않듯이 F는 달변일 뿐 아니라 언탐(言貪)이 심했고, 게다가 음성마저 성우나 오페라 가수처럼 좋았으며, 악기들도 곧잘 다루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볼 때마다, 그리고 그가 지역사회의 편견과 이런저런 불운에 시달린다는 소문을 접할 때마다, 내심, ‘목사길로 나서지 말고 음악가(성악가)로 나섰더라면!’ 했지만, 겉으로는 ‘음악목회’니 뭐니 하면서 그의 비위를 맞추고 애써 듣그러운 소리를 피하곤 하였다. ‘말이 많으면 자주 궁지에 몰리니 중도를 지키는 것만 못하다’(多言數窮不如守中)는 격언도 있건만, 참,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말씀’이 아니랄까봐, 한국의 목사들이 ‘말(씀)’많은 것은 차마 제 2의 천성이 된 듯도 하다. F는 그가 소시적 웅변대회에서 당선한 것을 여러 차례 들먹이면서 언변에 붙은 자신감을 스스럼없이 과시하기도 하였는데, 워낙 선량하고 낙천적인데다 더러 아이처럼 속없이 구는 탓에 그것조차 그리 흠잡을 만한 것이 아니긴 했다.
당연히 (자기)말을 전달의 신호로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듣고 즐기는 일은 ‘언어적 존재’(ens linguisticus)로서의 인간이 지닌 쾌락의 특이점이다. 그 중에서도 강화(講話)나 설교를 직업으로 삼는 선생이나 개신교 목사들의 경우, 그 쾌락은 종종 나르시시즘의 경계를 범람하기 마련이다.(물론 그 중에서도 계몽보다 ‘감동’에 주력하는 목회적 강화의 방식 속에는 음성을 통한 공감적 쾌락이 더할 것은 당연하다.) 다시 그 중에서도, F와 같이 음성이 좋고, 유창한 언변 솜씨에다가, 성직자로서의 종교적 카리스마까지 갖춘 경우 그 음성적 나르시시즘은 경우에 따라선 독특한 지점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문학적 감성과 그 창조력을 나르시시즘의 밑절미에서 염출하는 평자들의 논의가 흔한 것처럼, 나르시시즘은 그 자체로 별스런 것도 아니며, 또 반드시 걷어내야 할 쓰레기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엄격한 도덕적 의무론자(칸트주의자)가 아니라면, 정서의 고양(高揚)이나 정화와 같은 심리적 보상을 악착같이 타매할 노릇도 아니다.
다만 원론적으로 꼬집자면, 나르시시즘은 ‘보기’ 속에 반영된 자기나 혹은 그 유사자(類似者, semblable)-흔히 정신분석에서 ‘소타자’(小他者)라고 부르는 대상-보다는 ‘듣기’와 그 메아리 효과에 의해 더 깊이 탐닉되고 고착된다. 잘 알려진대로 인간의 시각은 비교적 지성적인 감각으로 치부되며, 이 사실은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하는 어원적 연구-예를 들어, ‘테오리아’(θεωρια)-에 의해 자주 예시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인간의 시각은 다른 감각에 비해 급속히 진화했고 문화적으로 안정되었지만, 그 대신 실재와의 조응력(調應力)이라는 그 원초적 교감능력을 차츰 상실해 버린 것이다. 한낮에도 별을 보았다던 선원들에 대한 보고(J. 프레이저)나 시력이 무려 10.0에 이른다는 초원의 유목민들에 대한 얘기들은 그 원초적 조응력의 다만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의 시각체험을 생물학적으로 살피면, 망막의 뒤쪽에 있는 광수용체(光收容體)를 통해 빛의 파동은 디지털 신호로 바뀌어 뇌에 전달되는데 뇌는 제 나름의 형식에 의해 그 결과물을 이미지의 형식으로 제시하게 된다. 이는, 시각체험이 정신적인 체계화의 과정을 닮았을 뿐 아니라 일종의 ‘간접화’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요컨대 우리가 시각에 머물러 있는 이상, 전기화학적 변화의 메커니즘에 매개된 채 변환출력 되는 이차적 이미지를 실재인 양 오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불교적 용어로 고쳐 말하자면, 견분(見分)을 잊은 채 상분(相分)이 실재인 양 착각한다고 할까.
나찌 게쉬타포의 수장 하이드리히(Reinhard T.E. Heydrich, 1904-1942)같은 인간 백정들마저도 특별히 음악적인 쾌락에 민감했듯이, 음성과 소리에 대한 반응은 니체나 쇼펜하우어의 주장처럼 선악의 윤리적 경계를 넘어서기 마련이며, 따라서 실재(das Reale)에 돌입하는 향유(jouissance)에 경험에 수반되곤 한다. 시각의 메커니즘을 전기화학적 생리현상으로 설명했지만, 헤겔에 따르면 청각은 이와 달리 단순히 물리적인 질서로 축소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청각은 시각보다 더 이상적”인데, “왜냐하면 귀는 신체의 내적 진동(振動)에서 나오는 결과를 듣기 때문”(F. 헤겔, 『미학』)이다. 바로 이 내적 진동의 형이상학은 플라톤주의와 기독교, 그리고 하이데거에게까지 이어지는 서구 사상의 청각주의에 골고루 잠복해 있다. (물론 데리다가 ‘쓰기의 대리보충’을 통해 이 음성주의의 특권성을 해체한 것은 사계에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전술한 것처럼, 기독교의 하나님이 무엇보다도 ‘말씀하는’ 신인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고, 그 종을 자처하는 목사들이 말(씀)많은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인데다, 20세기 최고의 서구 사상가인 하이데거 역시 ‘말하는 존재’(das sprechende Sein)와 그에 대한 청종(聽從)을 제안하는데, 넉넉하게 보자면 다 그 맥락이 통하는 얘기들이다. 말하자면 이는 소리나 이에 대한 반응인 청각이 시각보다 더 실재에 근진(近進)한다는 판단이 전제된 것이다. “청각적 지각은 파동으로서의 실재를 파동으로서 수용한다는 점에서 실재의 ‘이미지’에 한층 접근해 있”으며, 결국 “‘보이는 세계’에 비해서 ‘들리는 세계’가 훨씬 실재 본연의 그것에 닿아 있다는 것”을 뜻한다.1)
흥미롭게도, 나 역시 현실원칙(Realitαt Prinzip)을 상회하는 실재적 향유의 숭고한 체험을 어떤 ‘소리-진동-공명’의 현상 속에서 겪었다. 20대 초반의 나는 교회의 청년부(대학부)와 부속된 편집실 활동에 열심을 부리면서 자연히 교회 건물 내의 이곳저곳에서 외박을 하게 되는 일이 잦았다. 일년 중의 반은 교회에서 보냈고, 대학의 전공은 철학이었지만 신학과 종교서적을 섭렵하는 데에 더 민속했던 터였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의 새벽 2-3시 경이었을까, 그날도 나는 교회의 교육관 테이블 위에서 불편한 잠을 청하던 중에 내 평생 영영 잊지 못할 어떤 엑스터시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비몽사몽간’-아, 그 모든 비상한 것들은 모두 비몽사몽간에 이루어지는 법이고, 이 사실을 밝혀 놓은 이들이 동서고금을 통해 적지 않건만 학인들은 모짝 이를 미립이나 한갓 술(術)로 폄하하면서 제도권의 알량한 논술 속에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만다-에 생긴 일이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지 못하는 사이, 졸연히 내 감각만은 극도로 예민해지는 어떤 조응(調應)의 상태에 빠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감각이 이른바 육식(六識)-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어느 한 곳에 제한된 게 아니라 밖으로 열린 모든 감각이 한데 섞여 버무려진 듯 내 몸과 더불어 일체화되었다는 데 있었다. 더욱 주의를 끈 것은 이 총체가 결코 청각은 아니었지만 일종의 ‘청각적’ 성분과 성격을 띠었다는 점이었다. 아쉽게나마 비유하자면, 내 몸은 그 전체로 하나의 거대한 ‘귀’가 되었고, 외계의 정보는 오직 이 귀가 된 신체의 감응(感應)에 고스란히 직입(直入)하고 있었다. 아, 그러나 그 직입이란, 주이상스의 정의처럼 참으로 무시무시한 쾌감을 품고 있었다. 지구가 내 몸이 되고, 내 몸이 지구가 되면서 비로소 얻는 동질 진동의 기이한 쾌감과 공포! 어떤 진동(振動)으로 내게 전해진 그 정보-에너지는, 처음에는 내가 누워있던 테이블의 진동에서 시작하였는데, 교육관의 진동으로, 이윽고 교회 전체의 진동으로 이어지다가, 마침내 지구 전체가 거대한 하나의 악기(樂器)처럼 진동하는 형식으로 내 (귀가 된) 몸에 여과 없이, 그리고 아무런 매개 없이, 말 그대로 직입(直入)했다. 그 직입 속에서 상호교감 하는 나와 비아(非我)의 존재 전체는 그 한/큰 진동 속에서 일말의 간극도 없었다. 그것은 마치 지구 전체가 회전하면서 내는 소리같이 굉걸(宏傑)한 것이었지만, 다만 내 ‘귀’에 들리는 게 아니라 마치 내 몸에 알알이, 넘실넘실 각인되듯 내 피와 살 속을 때론 실바람처럼 때론 폭풍처럼 흐르고 있었다. ‘주객의 일체’라는 말을 하긴 쉽지만, 이처럼 생생한 경험은 참 드물 것이었다. 나는 그간 이런저런 종류의 엑스터시의 체험을 접해보았지만, 이처럼 박진하고 절실한 것은 없었다. 그리고 그 경험의 알속은 그 무엇보다도 어떤 음악, 진동, 공명(共鳴)이었다.
나르시시즘이 음성적 자기공명(自己共鳴)과 구성적으로 관련된다는 점을 해명하기 위해서 조금 에둘러 왔지만, 아무튼 F와 같이 유창한 언설이 낭랑한 소리에 얹혀 신의 말씀을 대변하는 카리스마를 입고 발화될 경우 독특한 자기애적 탐닉이 생길만도 할 것이다. 아무튼, 그는 다변에 달변인데다 듣기엔 시큰둥한 채 내내 말하기엔 바빠, 소위 ‘말보다 행하는 게 빠른’(訥於言敏於行) 군자의 풍모는 아니었다.
게다가, 되먹지 못한 중이나 목사가 흔히 그러하듯이 그는 상대의 나이에 상관없이 말의 절반은 거의 반말투로 일관하는 악습이 있었다. 나는 그의 지기로서 책선(責善)하는 셈하고 몇 차례 이 점을 놓고 비평하였지만, 사람 좋은(!) 그는 ‘헤헤’거리기만 할 뿐 그 일로 자신이 혀를 자르거나 금식회개기도를 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특히 F가 목회하는 지역은 유달리 사투리가 심한 곳이고, 그 지역의 정치사회적 보수성은 마치 그 사투리의 결과 층 속에 고집스레 응결된 듯했다. 그럴수록 그런 사투리를 공유하지 않는 외지인으로서 그곳에 정착하여 종교상징적 권력을 획득하려면 우선 ‘말씨’의 예법이 중요했지만, F에게는 그런 고려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그간 나만 해도 그의 말씨를 두고 이런저런 악평을 엿들은 게 적지 않건만, 이 사람좋은 목사는 지금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말이 많고, 노소를 따지지 않고 반말을 해댄다.
헬렌 니어링(Helen Nearing, 1904-95)은 자신의 평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 1895-1986)와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 1883-1983)을 ‘말(씀)’의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다르게 평가한다. (물론 이 평가는 팔이 안으로 옥듯 조금 편파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 취지만을 가려 취하기로 한다.)

크리슈나는 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크리슈나는 교사들과 교사들의 가르침을 비난하고, 권위를 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스스로 전제군주처럼 연단을 독점한 교사로서 전세계에 걸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끊임없이 말했다.2)
누가 나더러 유쾌한 친구같은 사람이자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라고 한다면 바로 스코트와 같은 사람을 그릴 것이다. 현명하고 경험이 풍부하며, 친절하고 조용한, 말이 없는 편인 그는, 그러나 질문을 받으면 충분히 자기의견을 말하는 사람, 모든 면에 능통하지만 과시하지 않고 꾸밈이 없으며, 풍채가 훌륭하면서도 허황되지 않는, 진지하지만 유머가 풍부한, 깊은 감수성을 가지고 있되 절제되어 있는 그런 사람이다.3)


김영민 l 철학자, 좬동무론좭(2008, 한겨레출판>외 다수의 단행본 저자/ jajaym@hanmail.net
글쓴이 / 김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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