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서로 마음을 열어 고민과 아픔을 나누고 치유하며 행복을 모아내는 게시판입니다.

[기독교사상 7월호] 김기석과 손석춘의 대화 (11) 
‘원죄’의 원죄와 새로운 사회
 

출처 : 기독교사상 7월호 http://clsk.org/gisang/  


cover_631_s.jpg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김기석 목사님.
이 나라 곳곳에 사람들을 지치게 만드는 찌는 더위가 한창입니다. 다시 목사님께 편지를 쓰며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익히 알고 있을 ‘주의 기도’를 경건한 마음으로 들머리에 옮깁니다.

목사님께서 주셨던 편지를 읽고 성경을 펴들어 다시 주의 기도를 조용히 읽었습니다. 그 까닭은 아마도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저의 민망함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어서였습니다. 목사님께서 지난 제 편지를 “읽는 동안 호흡은 거칠어졌고, 말문이 막혔고, 사고는 정지되었던 모양”이라고 쓰신 대목에서 먹먹했습니다. 

목사님은 이어 “마치 숨기고 싶었던 치부가 드러난 듯 부끄러웠습니다. 외부자의 눈에 비친 교회의 모습이 강도의 굴혈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답장이 어렵습니다. 맞장구를 치자니 나 또한 교회의 한 부분이고, 변명하자니 군색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라고 덧붙였지요. 

감히 그 심경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길을 온전히 걸어가시고 계신 모든 분들이 아마 지난 저의 편지에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과연 제가 그런 편지를 보낼 자격이 있는가를 거듭 성찰해보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신학의 길을 밟고 싶은 충동마저 제 마음에 스멀스멀 일어나고 있다는 고백으로 그 민망함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습니다. 

김 목사님.
주의 기도를 찾아 <마태복음>을 펴 찬찬히 읽으며 새삼 기도 앞에 놓인 말씀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습니다. 목사님께선 너무나 잘 아시는 대목이겠지만, 또박또박 옮겨봅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 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그 말씀으로부터 2000년이 흘렀지만 오늘 이 땅에서도 현실을 꿰뚫는 통찰로 다가왔습니다. 겉을 꾸미는 기도나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는 기도가 얼마나 넘쳐나는가요. 왜 예수가 당대의 성직자들과 날카롭게 각을 세웠는지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홀로 기도하라고,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지 말고 조용히 기도하라며 일러준 고갱이가 바로 주의 기도입니다. 

주의 기도를 거듭 읽은 뒤 하릴없이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더군요. 기도할 때 겉을 꾸미는 일을 경고한 예수는 외식은 물론 아예 자신이 가르쳐준 기도의 원문을 무람없이 바꾼 오늘의 기독교 현실을 어떻게 볼까요? 더구나 <누가복음>에 따르면 주의 기도는 제자가 어떻게 기도하는가를 물었을 때 “이렇게 하라”며 일러준 기도문입니다. 

김기석 목사님.
목사님은 지난 편지에서 예수를 바라보는 속마음의 일단을 보여주셨습니다. “갈릴리의 예수를 말하는 이들은 급진적으로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갈릴리 예수와 접속되는 순간,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시선입니다. 기존질서는 언제나 그 질서에 동화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급진’ 혹은 ‘불온’의 낙인을 찍곤 했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좌파’라는 말이 자주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예수가 ‘좌파’라는 저의 확신은 더욱 깊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을 억압하는 종교와 제도에 맞서 모든 생명의 존귀함을 가르치고, 종교 지도자들의 민낯을 폭로하면서 참된 신앙은 가름이 아니라 포용에 있음을 가르친 예수, 기존질서의 입장에서 그는 정말 위험인물이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에 모두 공감합니다. 스스로 보수를 자처하는 기독교인들이 진지하게 경청해야 할 말씀입니다. 다만, 아니 그럼에도 저는 그 대목을 목사님의 참뜻에 맞춰 새롭게 말씀드려보고 싶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갈릴리의 예수’가 따로 있고 ‘성경의 예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니까요. 저는 바로 그 당연한 사실을 새삼 주목하고 싶습니다. 흔히 예수를 바라보는 시선이 보수와 진보의 신학으로 나누어진다고 하지만 저는 그런 구분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니, 예수는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나 대립을 넘어선 곳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목사님께서도 교회 현실을 비판하기 위한 의도로 그렇게 표현하셨겠지만, 저는 예수가 ‘좌파’라는 목사님의 확신이 새로운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수나 진보, 좌와 우가 아니라 예수의 진실을 찾아야 옳지 않을까요. 목사님, 실은 주의 기도에 눈의 번쩍 뜨인 이유도 거기 있었습니다. 그래서 과연 죄가 무엇인지 여쭈었습니다. 

김 목사님.
저는 다시 옷깃을 여미며 예수가 제자,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르쳐준 기도를 되새겨 봅니다. 왜 예수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 지은 자를 탕감하여 준 것같이 우리 빚을 탕감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했을까요? 왜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쳤을까요.

저는 그 기도의 고갱이가 인류의 역사에서 어느 순간 나타난 예수가 갑작스레 제안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목사님께 지난 편지를 드린 뒤 성경을 펴들어 <신명기> 15장을 다시 정독했었지요. 

예수의 말씀 훨씬 이전에 이미 모세가 받은 하나님의 명령이 ‘오해’나 ‘해석’의 여지없이 명쾌하더군요. 빚을 탕감해주라는 말씀 뒤에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라는 대목(15:4)이 거룩하고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이어 제가 무릎을 친 구절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 어디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15:8)는 말씀 뒤에 ‘죄’를 언급한 대목입니다.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 칠년 면제년이 가까웠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15:9)

<신명기>에 기록된 말씀은 단순히 빚의 탕감을 이르는 게 아니라 빚을 탕감해 줄 면제년이 다가왔다면서 빚을 주지 않는 것을 “죄”라고 명토 박았습니다. 

김기석 목사님 어떻습니까? 다시 고백하거니와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가령 내년이면 모든 빚을 탕감해주어야 하는 데 올해 제게 돈을 빌려달라는 사람에게 과연 지금의 저는 선뜻 돈을 빌려줄 수 있을까요? 사뭇 ‘민중의 벗’인 듯 행세하며 살아온 저 자신이 그 물음 앞에 참담해졌습니다. 정직하게 토로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목사님. 
그런데 다름 아닌 하나님이 바로 그것을 “죄”라고 꾸짖고 있습니다! 면제년을 앞두고 궁핍한 형제가 돈을 빌려달라고 할 때 그 사람을 좋지 않게 바라보는 눈을 하나님은 “악”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명기>는 이어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는 고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15:11)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중언부언할 필요가 전혀 없을 만큼 말씀이 명쾌합니다. 예수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압축적으로 다듬어 주의 기도로 간추렸던 게지요. 그런데 바로 그것을 기독교는 두루뭉술하게 바꾸며 고갱이를 훼손했습니다. 새삼 목사님께 죄란 무엇인가를 묻고 싶었던 이유입니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이심전심이었을까요. 마침 <기독교사상>은 제 편지가 실린 5월호 특집을 “죄인입니다”로 잡았더군요. 목사님께서도 답장에서 언급하셨지만 저도 그 특집에 실린 주옥같은 글들을 정독했습니다. 

정홍열 교수의 글을 통해 “성경이 죄에 대해서 언급하는 모든 국면마다 기본적인 정조는 죄를 어떤 도덕적인 일탈행위로 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일탈로 보려한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관계의 일탈의 기원이 매우 근원적이고 본질적이라는 데 원죄론이 자리 잡고 있더군요. 기실 죄를 가리키는 성경의 용어가 구약이든 신약이든 모두 ‘과녁으로부터 어긋남’을 뜻하지 않습니까? 정 교수는 창세기의 인간창조 기사를 톺아보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죄를 짓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왜곡과 단절이 발생되었다고 분석했습니다. 그 죄의 결과가 그 이후의 인류를 지배하는 운명과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설명이지지요. 

문제는 그 뒤 교회와 신학이 걸어온 모습입니다. 교회의 전통적 또는 정통적 교리가 아담으로부터 태어난 모든 인류가 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상태로 보는 데는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출발해 종교개혁자들의 생각이 큰 기여를 했더군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원죄를 유전되는 것으로 정리하며 성행위를 통한 임신을 매개로 죄가 전달된다고 해석할 때, 우리는 그의 죄 개념이 <신명기>와 주의 기도에서 나타나는 죄로부터 얼마나 벗어나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철 교수의 글 ‘그리스도교에서 바라본 죄의 사회적 의미’는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신학의 죄 해석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었습니다. 가령 죄렌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1813-1855)가 죄를 실존의 근원적 불안과 연결시켜 “신과의 관계 상실 속에서 드러나는 유한한 실존의 감정이며 정서”로 불안을 제시한 대목이나,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가 죄를 본질로부터 소외된 실존의 상태와 관련하여 정의한 사실도 충분히 의미 있는 탐색이라고 생각됩니다. 전 교수는 “죄에 대한 정치사회적 해석”도 제시했습니다. 한국에서 민중신학을 개척한 서남동과 안병무가 죄를 해석한 글들도 그 연장선에서 정리했더군요. 서남동(1918-1984)은 죄를 역사에서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을 누르는 이데올로기로 분석했고, 안병무(1922-1996)은 죄를 공(公)의 사유화로 해석했지요. 

그런데 김 목사님.
저는 그 죄를 분석한 신학사를 간추린 글들을 읽으면서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과연 그게 실존주의적 해석이나 정치사회적, 또는 경제적 해석으로 나눌 수 있는 문제일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곧장 예수의 가르침으로 다시 돌아가 보지요. 예수는 당연히 실존주의자도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었지요. 물론 보수주의자도 진보주의자도, 좌파도 우파도 아니었습니다. 

이념의 잣대나 정치적 잣대를 떠나 예수를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고 제가 들머리에서 강조했던 이유입니다. 

목사님, 아직 터무니없이 짧은 지식이지만 가능한 성경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예수는 <신명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을 가장 성실하게 받아들였기에 겉치장에 사로잡히고 중언부언하며 율법에 얽매인 성직자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지요. 더 큰 문제는 예수가 온 몸을 던져 비판한 바로 그 겉치장에 사로잡히고 중언부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예수 이후에도 큰 흐름을 형성해왔다는 데 있지 않을까요. 그것도 ‘예수’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김기석 목사님.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죄로 해석해 온 기독교적 전통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연장선에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아담과 이브에서 유전적 원죄를 찾는 것보다, 이웃의 빚을 탕감해주라는 <신명기>와 주의 기도에 명명백백하게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을 스스럼없이 왜곡하고 지키지 않는 사람들의 역사에서 원죄를 찾아야 옳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명령과 예수의 기도가 명확하게 제시한 길을 뒤틀어 ‘빚의 탕감’을 ‘죄의 용서’로 슬그머니 물타기 한 사건, 조금 더 간명하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말씀을 내놓고 왜곡한 그 사건이야말로 원죄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그 명백한 ‘원죄’를 모르쇠하고, 원죄를 유전적으로 규정하고 확산해온 데서 우리는 ‘원죄의 원죄’를 규명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원죄를 그렇게 파악할 때 우리는 그동안 신학사가 일궈온 성과를 모두 융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왜곡해서 전하는 행태야말로 가장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상황이니까요. 우리는 그것을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듯이 “신과의 관계 상실”에서 비롯한 불안으로 읽을 수도 있고, 안병무가 해석했듯이 “공(公)의 사유화‘라고 풀이할 수도 있을 터입니다. 

기실 빚을 탕감해주라는 말씀을 죄를 용서해주라는 말로 바꾸면, 모든 게 합리화 될 수 있겠지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왜곡한 사실까지 언죽번죽 용서해달라는 논리로 이어지니까요. 저는 주의 기도에서 ‘빚’을 ‘죄’로 바꿔온 오랜 역사야말로 무릇 사람의 원죄가 어디에 있는가를 증언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김 목사님.
대체 죄가 무엇인가를 목사님께 여쭤 본 지난 편지가 실린 <기독교사상>을 읽고 캐나다 토론토 알파한인연합교회(www.akuc.org)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계신 정해빈 목사가 편지를 주셨습니다. 그분은 원죄와 죄인의 틀보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고 사랑하는 틀로 기독교를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 뒤 “선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생명과 평화,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웃의 고통 위에서 우리가 번영을 누리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들 모두는 신과 역사 앞에서 죄인들인지도 모릅니다”라고 진단했습니다. 이어 같은 토론토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며 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는 이정국 박사의 설교문을 덧붙여주셨더군요. 이 박사의 설교문에서 제가 인상 깊게 읽은 대목을 나누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서 감사와 기쁨으로 살되, 우리의 사회적인 죄, 경제적인 죄, 정치적인 죄, 이웃과의 관계에서 지은 죄, 자연에 대해 지은 생태적인 죄, 이런 구체적인 죄들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더 많이, 그리고 더 심각하게 이야기 하고, 또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실제적인 신앙실천에 교회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이 사회와 역사 속에서 흙먼지 뒤집어쓰며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삶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기 힘든 죄의 연쇄사슬 속에, 그리고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사회구조와 문화 속에서 한 덩어리로 뒤섞여 사는 삶입니다. 그 누구 하나도 ‘나는 죄 없다’ 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상황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지어졌고, 우리가 가입하는 mutual fund를 통해 전 세계 원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원유와 광산 산업이 자금공급을 받습니다.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얽혀있는 경제구조, 사회구조 속에서 누구도 죄인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하나님께 회개함으로써 쉽게 그리고 빠르게 ‘용서’받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배우고, 연구하고, 그것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를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행동에 옮기는 것이 세상 변혁의 희망으로 출발한 기독교인의 올바른 자세일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이 세상이 하나님 나라 되게 하시려고 애쓰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죄를 다루고 죄와 싸워가는 방식일 것입니다.

이정국 박사는 애매하고 추상적인 죄, 원죄, 종교적인 죄가 아니라, 우리 눈앞에서 회오리치는 구체적인 정치적·사회적·경제적·생태적 죄들을 고백하고 그것에 대해 심각하게 마음 아파하며, 그것들을 넘어서는 다른 삶의 방식들을 진지하게 모색하고, 크든 적던 그것을 실천해 나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자고 호소하며 설교를 맺었더군요. 

김기석 목사님. 
공연히 원죄를 들먹일 게 아니라 실제 “구체적인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생태적 죄들”에 주목해야 한다는 캐나다 토론토대학 신학박사의 설교에 저는 공감합니다. 동시에 저는 원죄를 가볍게 볼 뜻도 없습니다. 인간에게 원죄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야기했듯이 유전되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빚을 탕감해주라는 <신명기>의 하나님 명령을 어기고 심지어 주의 기도까지 왜곡한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롭게 ‘원죄’를 개념화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로 그때 그것은 “구체적인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생태적 죄”인 동시에 “실존적인 죄”가 될 수 있겠지요. 

물론 저는 정해빈 목사와 이정국 박사의 궁극적 제안에 공감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본디 ‘기쁜 소식’이고 복음이라는 통찰이 그것이지요. 이 박사가 말했듯이 전 세계적으로 얽혀있는 정치경제구조 속에서 누구도 죄인 아닌 사람이 없지만, 그것을 하나님께 회개함으로써 쉽고 빠르게 ‘용서’받으려 할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배우고, 연구하고, 그것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를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행동에 옮겨간다면 그 자체가 이미 ‘기쁜 소식’이 아닐까요?

아마도 같은 맥락에서 김기석 목사님도 지난 편지 말미에 저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 게 아닐까 짐작됩니다.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지금 우리가 집중해야 할 일들은 무엇일까요? 잘못된 관행과 제도와 정치 행태에 저항하는 일과, 대안을 제시하는 일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대안은 물론 획일적이어서는 안 되고 다양성을 담보해야 하겠지요? 선생님은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어떤 발전의 모델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김 목사님의 그 질문에 이제 답할 차례입니다. 저 또한 그 질문 앞에 부끄러움부터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안을 만들겠다고,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발전의 모델을 만들겠다고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새사연)을 창립했지만 아직 모든 분들을 설득할만한 모델을 내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말이 대안이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언제나 현실을 내세우는 분들을 위해서 실제 구체적 삶에서 보기를 들어볼까 합니다. 미국과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부익부빈익빈을 심화시킨 신자유주의 모델보다 나은 대안은 우리가 흔이 지나치기 쉽지만 실제 현실로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유럽의 복지국가 모델은 한국과 역사와 사회적 조건이 다르지만 우리가 ‘신앙’처럼 떠받들고 있는 신자유주의 모델과는 분명 다릅니다. 뒤늦게 이 땅에서 복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는 오늘은 그래서 반갑습니다. 

더러는 북유럽국가들은 우리보다 잘 사는 선진국 아니냐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훨씬 낮은 브라질이나 베네수엘라는 지난 10여 년 동안 부익부빈익빈을 크게 줄여왔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물론, 김대중-노무현 정부마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글로벌스탠더드’로 받아들였을 때, 브라질의 룰라 정부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는 다른 길을 꾸준히 걸어왔습니다. 

물론, 우리는 북유럽 모델이나 브라질 또는 베네수엘라 모델을 직수입할 수 없고 직수입이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다름 아닌 우리 모델을 찾아야겠지요. 

목사님. 
제가 부끄럽다고 말씀드린 더 큰 이유는 주의 기도와 <신명기>로 명토박은 ‘빚의 탕감’이라는 정신을 새사연이 온전히 대안모델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있어서입니다. 어느새 저 자신부터 예수의 가르침과 달리 타협적 모델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가 인류에게 길을 제시한 시대와 작금의 시대가 다르다는 객관적 현실을 이유로 들고싶습니다만, 어쩐지 그것은 변명처럼 다가옵니다. 아무튼 대안 모델은 빚을 탕감함으로써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여 가난한 사람이 없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최대한 구현할 수 있는 사회이어야겠지요. 

새사연이 제시한 모델, ‘사람중심 경제’는 아직 완결된 대안은 아닙니다. 창립 직후인 2006년 연구원 이름으로 낸 책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에서는 ‘노동중심경제 모델’로, 2008년 제가 낸 책 <주권혁명: 우리가 직접 정치하고 경영하는 즐거운 혁명>에선 ‘민주경제 모델’로 대안을 개념화했습니다. 모델의 핵심 원리는 물론 같습니다. 다만 어떻게 개념화하는 게 국민 대다수에게 가장 쉽게 다가올 수 있을까 고심하고 있습니다. 같은 모델을 최근에 사람중심경제 모델로 제시하고 있는 이유도 그 연장선입니다. 

저희가 구상하고 내놓은 대안 모델의 뼈대는 튼실하다고 자부합니다. 무엇보다 사람중심 경제는 19세기와 20세기의 이념적 접근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가령 한 국가 단위에서 자급자족 경제체제를 구현하면 국가 구성원이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듯이 경직되게 고집하거나, 마치 지금이라도 곧 자본주의를 폐절하고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이룰 수 있는 듯이 경박하게 자신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역사 전개과정과 동떨어진 텅 빈 공간에서 경제 대안을 모색하지는 않습니다. 오늘의 현실에 바탕을 두고 그것을 넘어선 새로운 경제체제를 구현해나가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사회의 밑그림인 사람중심 경제, 더 정확하게 노동중심 경제는 단순히 머릿속 관념 수준의 논의는 아닙니다. 세계사적으로 자본이 경제 발전을 주도하는 시대가 사람의 노동이 주도하는 시대로 이동하고 있는 흐름에 정확히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20세기 후반부터 본격화하고 있는 과학기술 혁명과도 맞물려 있지요. 아시다시피 산업혁명이 일어난 뒤 20세기 중반의 소품종 대량생산 시대까지 생산성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는 기계였고 그것을 갖출 능력이 있는 자본이었습니다. 일하는 과정에서 노동자의 자율성이나 두뇌 사용은 대단히 제한되어 있었지요. 생산성을 높이는 데 이차적인 요소였을 뿐입니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구적 차원에서 자본의 과잉 현상이 두드러지게 전면화 하기 시작했지요. 자본주의 세계 시장이 날로 격화하자 자본은 상품의 차별화 및 다양화를 모색하게 되었고 기계제 대공업 아래에서 중요성이 퇴화했던 노동의 창조성이 자연스럽게 경제의 고갱이로 등장했습니다.

생산 체계를 혁신하고 생산성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가 기계 장치에서 사람의 창조성으로 옮겨지게 됨으로써 노동이 다시 생산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변화의 물결은 지식과 노동의 결합으로 증폭되었지요. 저희는 앞으로도 그런 흐름은 강화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노동을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신자유주의의 한계는 뚜렷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노동을 중심에 둔 대안모델 체제의 두 기둥은 노동자가 삶의 자기실현을 할 수 있는 권리 보장과 기업 경영에 노동자의 전면 참여입니다. 경제 발전에 노동의 창조성을 최대화하는 방안이지요.

김기석 목사님.
신자유주의 모델처럼 자본이 중심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인, 노동이 중심인 대안 모델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더 말씀 나누기 전에 편하게 여쭙겠습니다. 목사님께서 목회를 하시며 염두에 두시는 사회는 어떤 모습인지요? 어떤 사회가 가장 예수의 길과 맞닿아있다고 보시는지, <신명기>와 주의 기도는 어떤 사회를 우리에게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목사님과 함께 대안 모델과 그 기독교적 의미를 조금씩 구체화해나갔으면 합니다. 

찌는 더위에 모쪼록 목사님과 청파교회 신자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손석춘 l 님은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장으로 언론학 박사이다. 동아일보 기자,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중앙대-연세대 겸임교수, 언론개혁시민연대 창립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신문읽기의 혁명1, 2권』을 비롯한 언론비평서와 『순수에게』,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 장편소설 『아름다운집』을 발표했다. 민주언론상, 통일언론상, 한국언론상, 한국기자상, 안종필자유언론상을 수상했다.


글쓴이 / 손석춘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sort
공지 일반 중앙일보 교보문고, 올해 인문서 우린 다르게 살기로했다 imagefile 조현 2018-12-21 20282
공지 일반 조현의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 북콘서트 초대 imagefile 휴심정 2018-12-03 24966
공지 게시판 글쓰기에 관한 안내입니다 [3] admin 2011-07-08 770111
18 일반 대한민국이 배워야 할 독일의 복지제도와 봉사활동 image [3] anna8078 2013-01-24 23607
17 일반 김기석과 손석춘의 대화 - ‘광신의 본성’에 대해 imagefile anna8078 2011-07-08 22847
16 일반 새로운 사람의 길 - 김기석과 손석춘의 대화 imagefile [3] anna8078 2011-12-13 21301
15 일반 Y의 고백 - 남자를 다시 생각하다 image guk8415 2012-07-16 20616
14 일반 한반도 통일, 기독교의 역할은 사라진 것인가? imagefile anna8078 2012-09-03 19668
13 일반 말씀이신 하나님, 말(씀)많은 목사 / 기독교사상 sano2 2011-09-28 19258
12 일반 ‘예수’는 보수적이고, ‘그리스도’는 진보적인가 imagefile guk8415 2012-04-04 19225
11 일반 김기석과 손석춘의 대화 - 우리는 지지 않는다 imagefile [1] anna8078 2011-09-15 19121
» 일반 김기석과 손석춘의 대화 - ‘원죄’의 원죄와 새로운 사회 imagefile anna8078 2011-08-11 18510
9 일반 하나님을 섬기는가? 돈을 좇는가? imagefile anna8078 2012-08-06 17600
8 일반 교회남성은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가 imagefile guk8415 2012-06-25 17111
7 일반 신흥종교에 대한 사회학적 의미와 진단 imagefile anna8078 2013-01-03 16257
6 일반 교회와 국가, 한국기독교의 경험 imagefile guk8415 2012-05-02 16125
5 일반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 imagefile anna8078 2011-10-25 16029
4 일반 지구의 절규, 마음의 절규 imagefile anna8078 2011-11-17 15557
3 일반 한기총 금권선거 논란에서 ‘한국교회연합’ 출범까지 imagefile guk8415 2012-06-07 14089
2 일반 한국 장로교 사회운동의 흐름과 책임 imagefile [2] anna8078 2012-10-29 13788
1 일반 분단의 ‘고’(苦)를 넘어 통일로 image anna8078 2012-09-27 11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