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서로 마음을 열어 고민과 아픔을 나누고 치유하며 행복을 모아내는 게시판입니다.


교회와 국가, 한국기독교의 경험 




출처 : 기독교사상 http://clsk.org/gisang/



cover_640_s.jpg ‘교회와 국가’란 말은 종교와 정치의 제도적 표현이다. 내가 ‘교회와 국가’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1970년대 후반이었다. 대학원 강의에 ‘교회와 국가’라는 과목이 있는가 하면, 이 문제를 주제로 강연회가 열리고 심포지엄도 있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본 풍경이었다. 물론 교회와 국가 문제는 한국교회사의 어느 시기에나 볼 수 있는 주제이지만, 양자 사이의 관계나 정교분리, 종교의 자유 같은 문제를 여기저기서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일은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교회와 국가 관계에 대한 한국기독교의 경험은 이렇게 정리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근대역사에서 교회(종교)와 국가 사이의 유형, 분리 문제, 기독교나 유교를 국교로 삼는 문제에 대해 글이 나온 것은 1900년 전후 시기였다. 그 후 일제 강점기에 105인사건, 3·1운동, 신사참배 강요 같은 일들이 일어나 교회와 조선총독부가 충돌했다. 특히 1930년대 후반부터는 일제의 종교 간섭과 수정이 심각했다. 어느 시기보다도 교회와 국가 관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기였다. 이때 신앙은 본래 자유라 국가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윤태경의 주장이 나왔다. 일본국회의 종교단체법 제정을 우려하면서 한 말이었다. 신학자 정경옥은 발달된 종교일수록 국가의 한계를 벗어나 우주적인 사명을 띠게 된다는 말을 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종교 통제를 몸소 체험한 이들이다. 이 시기의 교회와 국가 문제는 국가의 종교 간섭이었다. 


1910년경부터 소수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국제회의에 참석해 서구 교회들의 ‘교회와 국가’ 논의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회의들이 한국교회가 교회와 국가 관계를 이해하는데 영향을 미친 것 같지는 않다. 1910년 에딘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협의회는 선교지에서의 교회와 정부 문제를 논의하였다. 윤치호와 선교사 몇 사람이 참석했다. 다시 에큐메니칼 차원에서 교회와 국가 문제를 논의한 것은 1937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열린 ‘교회, 공동체, 국가 회의’였다. 백낙준이 이 회의에 참석했지만 여기서 논의된 교회와 국가 문제는 한국교회에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했다. 일제하에서 신앙과 신학, 교회제도가 훼절된 상태에서 맞이한 해방이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 재건뿐만 아니라 국가 재건의 과업에 참여하기 위해 현실정치에 개입했다. 정치활동은 정당을 창당하는 일에서부터 정치적 영향력 행사를 위한 사회단체의 결성, 정계 투신 등 다양했다. 북한에서 기독교정당이 조직된 것도 이때였다. 교회 안에 그리고 한국사회에 정교관계 규범이 없는 상황에서 남한사회에서도 교회의 현실정치 참여가 최고조에 달했다. 이때 한경직은 일제의 포악한 정치 밑에서는 정치를 운위하기 어려웠지만 나라를 되찾은 지금은 누구나 다 정치에 관여해야 한다고 설교했다. 


바로 이 무렵, 1948년에 미국식 정교분리를 본 딴 헌법의 종교조항이 생겼다. 종교의 자유, 국교, 정교분리를 언급했다.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지며,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고,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남북분단의 혼란 가운데서 충분한 논의 과정을 거칠 수 없었기에 종교인들에게서조차 관심을 끌지 못했고, 국교가 왜 인정되지 않아야하는지 정교분리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소중함을 깊이 생각하는 이는 드물었다. 


정교분리란 인위적인 개념이다. 오늘날 많은 국가들에서 종교와 국가 관계의 일반적 특징은 정교분리다. 이 원칙 위에 서있는 국가를 세속국가라 한다. 세속국가 개념은 16세기의 재세례파들과 일부 사회철학자들에 의해서 옹호되어 오다가 1791년 미국헌법 수정1조에 들어갔다. “의회는 국교에 관한 법을 제정하거나 종교의 자유로운 행사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할 수 없다”는 문장이었다. 국교의 금지와 종교의 자유로운 행사를 보장하는 이 종교조항은 흔히 교회와 국가의 분리로 묘사된다. 이로 인해 미국은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철저한 세속국가가 되었다. 미국교회 역시 교회와 국가의 분리원칙을 주장했다. 분리가 무엇보다도 교회의 온전한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미국사회에서 역사적으로 ‘분리’는 교회와 국가가 서로 격리되어 있어야한다는 것을 뜻한 것이 아니었다. 국가의 종교 간섭과 종교 활동을 금지시키는 원칙이요 종교의 자유로운 행사와 세속국가의 유지를 보장해주는 것을 뜻했다. 


정교분리의 원칙이 헌법에 명시되었지만, 한국사회에서 분리는 지켜지지 않았다. 국가의 수반이 된 이승만은 국가의 공식행사를 목사의 기도로 시작하게 했다. 1951년에는 천주교와 개신교 성직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군종제도를 만들었다. 교회는 이를 이승만이 기독교 국가 비전을 실천한 사례로 받아들였다. 이승만은 청년시절부터 기독교 국가의 비전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교회는 대통령 선거 때마다 이승만을 위한 선거운동을 벌였다.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되어야 호교의 도움을 입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주장 속에는 국가의 지원을 받고자 하는 기대가 들어있는 것이다. 헌법의 정교분리 규정과도 배치되는 것이었다. 1956년부터는 교회 내부에서 교회의 선거운동에 대한 비판이 생겼다. 헌법상의 정교분리에 근거해서 교회가 어느 정당에 편승하거나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나오는가하면, 교역자가 정치에 참여해도 좋은가, 기독교정당이 필요한가 같은 문제들이 교회신문 <기독공보>에서 논의되고 있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해방직후에 북한에서 기독교정당을 조직한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서구국가들의 기독교정당을 부러워하였으나 그것의 문제점을 논의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처럼 1950년대는 헌법의 정교분리 조항을 염두에 두고 교회와 국가 관계의 구체적인 사례를 논의해보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정교유착의 시대였다. 교회의 정부 이용, 국가의 교회 이용이 극심한 시기였다. 


1960년대 이후 4·19혁명과 5·16구데타로 정치환경이 급변했다. 일부 교회는 정권과의 대립과 충돌의 험난한 시기를 보내야 했다. 이때 기독교의 정치참여는 주로 한일조약이나 개헌,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는 교회 내부와 정부 양측으로부터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정치와 종교 간의 갈등이 고조되어 갔지만, 그것을 성서나 교회사를 통해 설명해주는 책이나 선생을 찾기 어려웠다. 참고할 만한 책으로는 존 C. 베넷(김재준 역)의 『그리스도인과 국가』(1961) 그리고 리처드 J. 마우(문전섭 역)의 『기독교와 정치』(1975) 정도였다. 이 점에서 1979년 10월 서울 송암교회에서 열린 사와 마사히코(澤正彦)목사의 강연은 한국에서의 교회와 국가 관계사에서 보면 뜻 깊은 것이었다. 그는 기독교장로회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선교사로 우리나라에서 교회와 국가 간의 충돌을 보면서 1977년부터 2년 동안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 가서 종교자유, 정교분리 같은 주제를 공부한 인물이었다. 그는 수유리 송암교회에서 ‘신앙의 자유’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그는 한국에는 신앙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가 있으나 체험만 있지, 그 체험에서 나온 로고스, 말, 이론이 없다면서 우리나라에서 종교의 자유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어야 할 것을 촉구했다. 이 강연에서 그는, 헌법속의 정교분리 원칙을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해석했다. 그의 강연은 “신앙의 자유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현존>(1979년 12월)에 게재되었다. 나는 그의 강연을 듣고 강연회에서 소개된 텍사스 소재 베일러대학교(Baylor University) 교회-국가학과에 공부하러 갔다. 


개인 차원에서 교회와 국가 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을 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한국크리스찬아카데미,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대한기독교서회 등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79년부터 1980년대 초반에 걸쳐 NCCK는 회보나 강연을 통해 교회와 국가 문제를 다루었다. 한국크리스찬아카데미는 1980년 헌법개정 문제가 논의될 때 헌법의 정교분리 조항을 문제 삼았다. 정교분리의 의미를 국가의 종교간섭 금지로 해석했다. 2년 후 아카데미의 대화모임에서 교회와 국가 문제가 다시한번 주제가 되었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도 신학자, 사학자, 정치학자, 헌법학자들의 글을 모아 『국가권력과 기독교』(1982)를 간행하였다. 교회와 국가 문제 논의에 대한기독교서회도 가담했다. 대한기독교서회는 월간지 <기독교사상>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으며 이장식 교수의 『기독교와 국가』(1981)를 간행했다. 이 책의 저자는 1977년 처음으로 한국신학대학대학원 과정에 ‘교회와 국가’ 과목을 개설한 이장식 교수였다. 교회와 국가 과목의 개설은 한국의 신학도들이 교회와 국가 문제를 처음으로 학습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것이었다. 종교와 국가 문제는 다른 종교들에서도 관심사가 되었지만 1980년대 전후에 이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인 종교는 주로 기독교였다. 교회와 국가 문제에 대한 관심은 기독교계를 벗어나 법학계로도 확산되었다. 법률가와 법학자들이 가담한 한국종교법학회(1981년)가 창립되었다. 법학자 최종고는 『국가와 종교』(1983)를 펴냈다. 급격히 늘어난 교회와 국가에 대한 관심은 논문, 저서, 번역서, 심포지엄, 대화모임 등으로 나타났다. 여기에는 신학자, 법학자, 사회학자, 사학자, 정치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참여하였다. 정치비판의 성서적 신학적 근거와 정당성을 논의하는 것들이었다. 


이 시기에는 교회와 국가관계를 접근하는 방법에서도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교회와 국가 문제는 1937년 옥스퍼드회의 이후 한동안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1970년대에 다시 WCC의 생생한 이슈가 되었다. 세계 교회들은 변화된 상황에서 교회와 국가의 새로운 관계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1976년 8월 제네바의 보쎄이 에큐메니칼연구원(The Ecumenical Institute of Bossey)에서 교회와 국가 문제를 논의하였다. WCC가 주최한 교회와 국가 협의회에서는 ‘교회’와 ‘국가’라는 두 개념에만 관심을 가질 경우 협의의 범위에서 교회와 국가관계가 논의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교회와 국가’보다는 ‘교회, 사회, 국가’ 또는 ‘교회, 민중, 국가’라는 주제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런 관점에서의 교회와 국가 관계 이해는 한국교회에서는 1980년대에 신학자 김용복에게서 나타났다. 그는 제3세계 교회의 선교개념이 개인구원의 영역에서 사회구원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됨으로써 교회와 국가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가 낙후성을 면치 못한다고 보았다. 그는 “민중지향적인 정교관계” 모델을 주장했는데, 이것은 교회를 기구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의 운동으로 보면서 먼저 교회가 민족, 민중의 갈망에 어떻게 호응하는가 하는 문제를 취급하고 여기에 기초하여 국가권력과의 관계를 유연성 있게 대처하는 것이었다.


선교개념의 확대는 대체로 1980년대에 교회와 국가 관계 간 마찰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런 선교는 교회설립이나 교회 확장에 있지 않고 인간화, 억울한 사람이나 인권을 유린당한 사람,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까지 관심을 가졌다. ‘선교는 자유이며 한계가 없다’는 것이 일부 진보적인 교회들의 입장이었다. 5·16 쿠데타 이후 급속도로 팽창한 병영국가 권력에게나 대다수의 보수교회들에게는 저 활동들이 종교활동이 아니라 정치활동 또는 부당한 정치참여로 보였다. 1970년대 이후로 정부 관리들은 교회의 정치비판에 대해서 정교분리론을 내세워 그 부당성을 지적하려 하였다. 한국교회는 3·1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영역 이탈의 과오를 범했고, 오늘날에는 민권운동 참여에서 영역을 이탈하고 있다는 것이 교회사가 김의환의 주장이었다. 이들의 영향으로 1970-80년대만 해도 정교분리란 말은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거나 비판하면 안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김종필, 이효상, 이진희 같은 정부 관리나 여당 정치인들은 정교분리론을 개진하는 과정에서 종교의 고유한 권한에 속하는 종교 활동의 내용 및 범위를 규정하려 했다. 이것은 종교 활동의 본질이나 범위를 제한하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정부 고위 관리들의 종교에 대한 규정은 1974년부터 나타났으며 198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예를 들면 1983년 12월 이진희 문공부장관은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 9차 총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기독교는 한국화해야 하는가 그대로 있어도 좋은가 등의 신학적인 문제들에까지 간섭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 발언에 대해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각료급의 당국자가 종교의 교리에 속한다 할 신학적 연설을 공석에서 한 것은 건국 이래 최초가 아닐지 모르겠다”고 했다. 정부 관리들은 종교의 자유를 낡은 의미로 협의의 의미로 해석하면서 종교 또는 선교활동을 정의하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누가 종교 또는 종교 활동을 정의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에 대한 비판도 거셌다. 정교분리의 원칙은 국가의 종교에 대한 개입을 금지하는 것뿐이어서 그 역까지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헌법학자 양건 교수의 주장이었다. 민중이 주장하는 정교분리가 아닌 권력집단의 정교분리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는 한완상 교수의 주장도 정부측의 정교분리론에 반대해서 나온 것이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오경환 신부로부터도 나왔다. 그는 한국이나 남미국가 집권자들의 정교분리 개념을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려는 것이 아니라 집권자들의 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보았다. 이장식 교수 역시 정부의 정교분리론을 비판하면서 이 말에는 많은 논란이 붙어다니므로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는 말을 아예 헌법에 규정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아카데미안은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는 조항 대신 ‘국가는 종교에 관여할 수 없다’는 표현으로 헌법시안을 만들기까지 했다. 위에서 본 것처럼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친 시기는 한국역사상 처음으로 종교의 정치비판 문제로 정교분리 논쟁이 벌어진 시기였다. 이 싸움은 정부 및 보수교회의 정교분리론을 비판하는 이들의 승리로 끝났다. 1987년 보수와 진보를 불문하고 한국교회가 민주화운동에 분연히 가담하면서부터 정부나 보수 신학자들의 정교분리론은 힘을 상실했다. 해방 후 헌법에 들어간 미국식 정교분리 규정은 이렇게 독재정부와의 거친 싸움을 거쳐 한국인의 정교분리론이 되었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한국기독교의 교회와 국가 경험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이론적 성찰은 대체로 1970-80년대의 교회와 독재정부 사이의 갈등과 충돌 시기에,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또는 그 후 그 경험들을 반성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므로 정치영역에서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한국종교들이 사회복지 사업에 주력하고 종교단체들 중에는 국가의 재정지원을 받아 사회사업을 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사회복지 사업에서 교회와 국가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교회의 사회복지 기관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사업비를 보조받을 수 있는데, 이것이 정교분리 원칙에 위배되는 것은 아닌지 논란이 일 가능성이 있다. 국가의 종교 지원 문제는 최근에 와서는 국가문화재나 사찰의 템플스테이 같은 프로그램 차원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특히 문화재의 복구와 보존 차원에서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종교지원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이런 문제들이 장차 한국사회의 정교분리론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한국의 어느 종교들도 정부의 지원을 거부하지 않고 특정종교에 대한 편중 지원만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을 보면, 한국 종교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국가의 지원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앞의 문제들 외에도, 오늘날 우리가 교회와 국가 관계를 생각하면서 검토해 보아야 할 점은 2007년 10월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 서울노회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제기되었다. 발표자 및 토론자들은 달라진 상황에서 교회와 국가의 적절한 관계를 찾으려면 시민사회와의 협치(가버넌스)가 부상하는 시대에서의 교회와 국가 문제, 세계화된 자본주의 하에서의 교회와 국가 문제, 아시아의 다양한 종교전통 하에서의 교회와 국가의 이해 등을 검토사항으로 제시했다. 이런 토론은 장차 드러날 한국기독교의 교회와 국가 이해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흥수  교수는 미국 베일러대학교(Baylor University) 대학원에서 ‘교회와 국가관계학’을 공부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목원대학교 교회사 교수이며 아시아기독교사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sort
공지 일반 중앙일보 교보문고, 올해 인문서 우린 다르게 살기로했다 imagefile 조현 2018-12-21 20383
공지 일반 조현의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 북콘서트 초대 imagefile 휴심정 2018-12-03 25073
공지 게시판 글쓰기에 관한 안내입니다 [3] admin 2011-07-08 770380
2463 일반 자기 자신에게 잘해주기 imagefile anna8078 2012-12-03 17132
2462 일반 교회남성은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가 imagefile guk8415 2012-06-25 17117
2461 일반 용서를 찾아 떠나는 여행 wonmaroo 2013-04-05 17073
2460 일반 다른 사람에게 충고, 자주 하십니까? - 마음연구소 imagefile [1] guk8415 2012-12-11 16886
2459 일반 신단수와 보제수(보리수) 그리고 생명수 imagefile [1] muam777 2012-09-30 16831
2458 고민있어요 모던하게 쉬기 좋은 절 아시는 분! [1] jskimxms 2015-10-06 16805
2457 일반 단식후 법륜스님은... image [2] wonibros 2012-07-27 16740
2456 일반 인간은 왜 사는걸까..하는 생각이 들며 슬럼프에 빠질 때 [2] 지혜의여신 2008-01-09 16401
2455 일반 기독교인과의 대화 - 예수는 실존인물인가? [2] unmunsan1 2012-02-04 16318
2454 일반 신흥종교에 대한 사회학적 의미와 진단 imagefile anna8078 2013-01-03 16264
2453 일반 법륜스님, 정우성, 김제동, 윤미래가 한자리에 image julymind 2018-10-08 16255
2452 일반 달라이 라마 77회 생신 기념 장수기원법회 열린다 imagefile lotusosy 2012-06-25 16244
2451 일반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 인터뷰 image [2] 조현 2012-09-15 16235
2450 좋은 글 행복한 사진 [이철수의 나뭇잎 편지] 막가자는 거지요? imagefile anna8078 2013-07-11 16223
2449 일반 '나는 꼼수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권력이 화를 내면 쪼잔하게 보이잖아요." image dhsmfdmlgodqhr 2011-09-30 16195
2448 일반 똥 눌 때 똥 누고, 밥 먹을 때 밥 먹고 image [1] anna8078 2012-06-20 16144
» 일반 교회와 국가, 한국기독교의 경험 imagefile guk8415 2012-05-02 16136
2446 일반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 imagefile anna8078 2011-10-25 16034
2445 일반 한국교회는 바알의 신전인가? imagefile anna8078 2012-11-14 16028
2444 일반 성불하신 능허 거사 소개 아제보리 2008-04-02 16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