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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화>, 틱 낫 한 지음, 최수민 옮김, 명진출판, 2002

누구나 자신만의 독서 습관이 있다. 나의 경우 당대의 베스트셀러와 저자가 특정 인구 집단에 속하는 책은 읽지 않는다. 이런 오만과 편견에도 내 나름의 합리적 이유가 있다. 어쨌든 틱 낫 한(세 음절 모두 띄어 써야 한다)의 <화>는 나의 기피 기준에 완전히 부합한다. 당연히 읽지 않았으나 이 책을 읽어야만 대화하겠다는 이가 있어 오로지 인간관계를 위해 더운 날 구립도서관을 오갔다. 역시 내 원칙은 옳았다. 책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내용도, 실망도, 예상한 그대로였다.


말할 것도 없이 화(anger)는 간단한 논제가 아니다. 여성주의 심리학에서는 분노를 힘으로 본다. 분노는 타인의 공감,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복수’로만 ‘해결’된다. ‘마음의 독’인 화는 문명의 동력이기도 하다. 분노 조절보다 누구의 분노인가가 더 중요한 의제다.


사실 우리가 가장 억울할 때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뀔 때 아닌가. 가진 자의 분노는 제도적으로 보장·배려되고 약자의 분노는 폭력 취급하는, 약자는 우아하고 세련된 시민일 수 없게 만드는 이 시스템! 나는 간혹 “흥분하지 말라”는 소리가 가장 듣기 싫다. 최근 “참으라”는 논리는 뜸해졌지만 여전히 대개의 학문과 사회적 통념에서 분노는 부정적 에너지, 사회악으로 간주된다.


늘 화가 나 있는 사람, 자주 화를 내는 사람, 표현하지 않는 조용한 사람 등이 있다. 모두 한 사람의 모습일 수 있다. 사회적 인간은 아무에게나 화를 내지 않기 때문이다. 화를 내는 사람과 참는 사람의 차이보다, 대상에 따라 ‘화풀이’ 여부가 정해지는 경우가 더 많다.


진짜 문제는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화를 나게 하는 사람 아닌가? 예전에 읽은 틱 낫 한의 책(<힘>, <평화이야기>)은 그래도 덜했는데, <화>는 화를 돋우었다. 물론 책마다 타깃 그룹이 있고 모든 독자를 만족시킬 순 없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분노를 다룬다는 책이 인간의 고통에 대한 이해가 겨우 이 정도인가.


분노의 의미와 상처의 깊이를 모르는 사람만이 늘어놓을 수 있는 ‘아름답고 한가하고 피상적인’ 이야기들. 이 책은 한때 70만권 넘게 팔렸다. 위로를 갈구하는 현대인이 안쓰러울 뿐이다. 아시아 출신 도인들은 서구에서 ‘증명’받은 뒤 다시 아시아 시장으로 온다. 그들의 내공과 관련 없는 오리엔탈리즘, 불쾌한 지식의 정치학이다. 틱 낫 한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다 반전. 나는 단 한마디에 깊고 냉철한 위로를 받았다. 지난 몇 년 동안 시달려 왔던 개인적 의문까지 풀렸다. “내 행동만이 나의 진정한 소유물이다. 나는 내 행동의 결과를 피할 길이 없다. 내 행동만이 내가 이 세상에 서 있는 토대다.”(176쪽)


내가 아는 한 이 구절은 존재, 윤리, 언어에 대한 인류의 지적 성취를 요약하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행위 뒤에 행위자 없고(니체), 행동은 사상의 기반이 되며(비트겐슈타인), 인간은 행동의 반복으로 구성되는 재현(주디스 버틀러)이다.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내 몸이 나다. 타인을 판단할 필요가 있다면 그냥 그의 행동을 보면 된다. 행동이 그다. 이 말은 인간의 행불행은 개인의 결과(“내 탓이오”)라거나 부와 권력의 소유가 허무하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인간은 타인과 사물은 물론 자신도 소유할 수 없다. 가장 간단한 증거는 누구나 병들고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인간은 무엇을 소유할 수도 없고 누구로부터 버려질 수도 없다. 인간은 행동일 뿐 대상도 주체도 아니다. 그렇다면 버림받았다고, 모욕당했다고, 빼앗겼다고 분노할 이유도 적어진다.


‘참나’는 내 행동뿐이다. 인간사에서 죽음과 더불어 유일한 진실이 있다면 이것이다. 유일한 진실이자 유일한 정의인 것 같다. 모든 인간 행동이 평등한 조건에서 행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상관없다. 빈부나 선악은 행동의 목적이 아니라 행위 자체이고 우리는 그 과정에서 희로애락, 분노를 경험한다. 알아야 할 것은 분노의 본질이 아니라 분노의 위치다. 행동만이 나를 말해주고 내가 가진 유일한 것이다. 이 부담스런 소유에 나는 안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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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여성학 강사 

(*한겨레신문 7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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