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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모가 유학을 포기한 이유

임락경 목사 2011. 12. 06
조회수 24280 추천수 0

다석 유영모-.jpg

다석 류영모(1890~1981)

 

다석 류영모는 이 때 나셨고 이렇게 사셨다

 


흔히들 다석 류영모에 대해 말할 때 종교 다원주의자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본 류영모 선생은 종교 다원주의자가 아니다. 물론 그가 기독교인은 아니다. 그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는 분이었다. 물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기까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내가 본 선생님은 하나님을 너무나 깊이 아셨고, 하나님이 그의 안에 직접 역사하시고 계심을 뵈올 때마다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선생임을 뵈올 때 마다 나 또한 하느님과 가까워졌다. 그 분은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린 일이 없었다. 다만 불경을 깊이 연구하셨다. 불경 가운데 법화경 말씀을 자주하셨다. 선생님이 자주 말씀하셔서 나도 법화종 법주인 법화스님께 책을 얻어 읽어 보았는데, 그 책에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잃어버린 아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다만 마지막에서 누가복음은 돌아온 아들이었고, 법화경은 아버지가 찾으러 나간 것이 다르다.

 

선생님은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을 즐겨 읽으셨고 자주 말씀하셨으나 시경, 서경, 주역 말씀은 자주 하지 않으셨다. 동양학문으로는 노자, 장자를 스승처럼 여기셨다고 본다.

 

내가 20년 가까이 찾아뵌 바로는 선생님은 예수 믿는 사람이었다. 다만 교회 다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분의 말씀과 삶 속에서는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가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석가도 존경하고 노자, 장자를 스승처럼 여겼다. 톨스토이도 존경하고 간디를 존경했는데 간디를 생각하면서 한평생 인도 쪽으로는 오줌을 누지 않았다고 하셨다.

 

류영모는 1890년 3월 13일 서울 남대문 근처에서 태어나셨다. 10남매가 태어났으나 동생과 둘만 남았다. 그가 7살 때 콜레라에 걸려 쌀뜨물 같은 거품똥을 싸며 죽어가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다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억지로라도 살려보겠다고 손으로 창문을 7-8시간 동안 막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끝에 다시 생기가 돌아 살아나게 되었다. 이처럼 건강이 좋지 않아 얼마 살지 못할 줄 알았는데 어머니의 극진한 정성으로 살아남게 된 것이다.


 

학문은 이 정도


다섯 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천자문(千字文)과 동몽선습(童蒙先習)등을 배웠다. 서당에 가서 통감을 배우다 서당공부가 싫어서 집에서 3-4년을 보냈다. 열 살이 되던 1900년에 관립(官立) 수하동(水下洞)소학교에 들어가서 신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1910년에 한일합방이 되었으니 그때는 아직 10년 전이었다. 소학교에서 수학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훗날 오산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수(數)에 아름다움을 느끼셨고 한평생 날수를 계산하면서 사셨다. 말씀마다 숫자를 써 가면서 즐거워하셨다.

 

그 당시 서울에는 소학교가 총 아홉 개였으나 교장은 두 명이었다. 학교장은 교육부로 출근했다가 아홉 개 소학교를 순방하였다. 학년말 시험은 아홉 개 소학교 학생들이 모두 교동소학교에 모여서 보았고, 성적발표는 학교 바깥  벽에 성적 차례로 붙였다. 1,2,3등까지가 우등생이었고 나머지는 급제, 낙제로 구분했다. 류영모는 1학년 말에 1등인 수석을 했고, 2학년 때는 2등을 했고, 전체 5등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소학교는 3년제였으나 류영모는 2년만 다니고 서당에서 맹자를 배웠다.

 

1907년에는 일본어를 가르치던 경성학당에 들어갔다. 류영모는 경신학교에서 성경, 기독교사, 한문, 영어, 물리학, 산술, 대수, 천문학, 박물학, 지리, 한국사들을 배웠다. 그러나 1909년 3학년 졸업하기 전에 경신학교 교장의 추천을 받아 경기도 양평학교 교사로 갔으나 수업시간에 이 나라를 삼키려는 제국주의 일본을 비난한 것이 일본헌병의 귀에 들어가 그들의 협박으로 돌아오고 만다.

 

 

 

오산학교 교사

 


오산학교를 설립한 남강 이승훈은 당시 선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과학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를 구하기 위해 경신학교를 찾았다. 경신학교 교장 밀러로부터 과학 성적이 뛰어난 류영모를 추천받았다. 류영모는 이승훈의 초빙으로 1910년 9월 정주 오산학교 교사가 된다.

 

 

 

남강 이승훈을 신앙인으로

 

남강 이승훈은 나라사랑을 보여준 사람이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오랫동안 옥고를 겪고 마지막으로 풀려났다. 남강은 여덟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열한 살 때는 할머니마저 여의었다. 그리하여 유기공장을 하던 임일권의 방 심부름꾼이 되어 재떨이, 화로, 요강 따위를 챙기는 일을 하였다. 임일권의 신임을 얻은 이승훈은 뒤에 수금하는 일을 맡았다. 그리고 나중에 자립하여 유기공장을 차렸는데 사업이 크게 성공하였다.

 

신분이 상민이었던 이승훈은 양반들로부터 받은 설움이 한이 되어 거금을 주고 참봉(參奉-능(陵)지기나 문화재관리인)이라는 말단 벼슬을 샀다. 양반이 된 이승훈은 남보란 듯이 의관을 갖추어 입고 양반행세를 했다. 조선조 양반의 관존민비사상이 조선을 망하게 했던 것도 모르고 어쭙잖은 광대노릇을 했다.

 

그 후에 남강은 안창호를 만나 겉치레 양반행세를 접고 애국자로 거듭나게 된다. 신민회 평안북도 총감을 맡는가 하면 도산의 교육입국의 뜻을 받아들여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운다. 그러나 그 당시에 길러놓은 인재가 없어 교사 구하기가 힘들었다. 아니, 교사를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특히 신교육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과학교사는 더욱 찾기 어려웠기 때문에 경신학교까지 온 것이다.

 

그 당시 경신학교에서는 미국선교사들이 직접 과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류영모가 오산학교에 가기 전에는 춘원 이광수가 과학 수업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오산학교는 아직 1회 졸업생이 나오기 전이었고, 전교생은 80명이었다. 학생이라고 해도 대부분 선생과 나이가 엇비슷할 때였다(글 쓰고 있는 내 경우도 1956년 국민학교 다닐 때, 나이가 나보다 4-5세 더 많고 결혼한 친구들과 같이 다녔다).

 

류영모는 수학, 물리학, 화학, 천문 등을 가르쳤다. 류영모와 이광수는 오산학교 교단에서 3년 동안 동료로 지냈다. 이광수는 류영모보다 두 살 아래였다. 류영모에게 이광수에 대해 물으면 좀처럼 말씀을 안 하셨고 “재주 있는 분이지요”정도였다. 이광수는 소설가로서 면모는 보여주었으나 여성편력과 친일행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했는데 그 때문에 그에 관해 별다른 말씀을 더 하지 않으셨다.

 

그 당시에는 도산 안창호를 비롯한 나라사랑에 앞장선 선각자들은 이 나라 교육을 소홀히 한 결과 백성들이 무지몽매(無知蒙昧)하여 나라가 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고을마다 학교가 세워졌는데 정주(定州)에만 70여개나 되었다. 70여개 학교 학생들이 모여 대운동회를 할 때는 기수, 나팔수 빼고 북치고 꽹과리 치면서 응원하는 사람 빼면 운동선수로 뛸 학생이 없을 정도로 학생 수가 적었다.

 

류영모는 오산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정규과목을 가르치는 것보다 기독교정신을 가르치는데 더 힘썼다. 이때는 류영모가 기독교 신자가 된지 6년째로 정통교회 신앙에 익숙한 아주 열성적인 기독교인이었다.

 

류영모는 첫날부터 수업을 하기 전에 머리를 숙이고 같이 기도하자고 했다. 서울에서 온 5척 단구인 청년교사의 뜻밖의 요구에 학생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다 끝내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런데 류영모는 강제로 학생들을 기도하게 하지 않았고 혼자서 기도할 뿐이었다. 그렇게 1주일쯤 지나자 학생들이 스스로 기도하게 되었다. 사춘기에 들어선 학생들은 야생마 같았고 더욱이 나라 잃은 국민으로서 비분강개함이 그들을 더욱 거칠게 만들었다. 그러나 류영모가 온 뒤로 하루가 다르게 부드럽게 변해가고 있음을 이승훈은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승훈은 도산 안창호가 세운 평양대성학교를 수시로 오가며 학교운영도 살피고 안창호도 만났다. 대성학교에서는 기독교성경연구회 모임이 있었다. 이는 매주 수요일 방과 후에 신민회 총무이며 목사인 전덕기가 지도하였다. 때로는 미국인 선교사를 초빙하여 설교도 들었다. 안창호도 일요일에 교회 나가는 것을 권장하기도 했다.

 

 이런 대성학교의 운영 실태를 지켜보고 있었기에 이승훈은 기독교에 대해서 경계심이 없었고 오히려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런 때 류영모가 나타나 학생들에게 기독정신을 불어넣어 학생들의 태도가 바뀌는 것을 보면서 이승훈도 스스로 기독교를 믿기로 결심했다. 그러던 중에 그 당시 평양에서 제일 유명했던 산정현(山亭峴)교회의 한석진 목사를 찾아가서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설교를 듣는다. 그러고 나서 이승훈이 예수를 믿겠다고 고백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생긴 것이다.

 

이승훈은 기독교 신자가 된지 석 달 만인 1910년 12월 안병근 사건에 연루되어 평양에서 서울로 오는 기차 안에서 일본 헌병과 경찰의 합동검문으로 체포되어 2년 동안 제주도로 유배를 떠난다. 제주도 유배형이 채 끝나기도 전에 데라우치 총독 살해음모사건으로 조작된 ‘105인사건’에 또 연루되어 10년 형을 언도받고 1915년 가출옥이 될 때까지 5년 동안 옥고를 치른다.

 

그 다음에는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서 4년 동안 다시 감방살이를 하고, 1922년 7월 33인 가운데 맨 마지막으로 출옥했다.
 
일본제국주의시대의 감옥은 감옥이라기보다 지옥에 더 가깝다. 도산 안창호를 비롯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감방에서 죽어갔다. 그러나 남강은 잇따른 장기간의 옥고를 치르고도 더 싱싱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타고난 체력, 인고의 생애, 불굴의 애국정신, 일신(日新)의 신앙이 가지고 온 기적이었다. 남강은 감옥일지라도 하느님이 계시면 천국이라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었다.

 

“감옥에서 어떻게 그리 기쁜지 모르겠어요. 하느님 당신께서 내 머리 위에 계신 것 같아요. 여러 사람 가운데서 내가 가장 초신자인데 내가 제일 위로받는 것 같아요. 내가 성경을 가까이 한 곳은 감옥이었어요. 마침내 감옥이 조금도 괴롭게 생각되지 않았어요. 젊은 사람들도 다 싫어하는 감방 똥 청소를 자진해서 도맡아 했어요. 손으로 똥을 치우며 ‘주여 감사합니다. 바라 건데 이 감옥에서 나가는 날 이 백성을 위하여 이 똥통 소제한 것을 잊지 말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어요. 감옥이란 참 이상한 데예요. 강철같이 강해져서 나온 사람도 있고 썩은 겨릅대 같이 폭삭 약해져서 나오는 사람도 있어요.”

 

 이승훈은 옥중에서 구양성경을 스무 번 읽었고 신약성경을 일백 번 읽었다고 했다. 그 후 쉰한 살에 평양신학교에 들어가 3학기 동안 신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1916년 장로가 된 이승훈은 교회를 대표해서 노회에 참석하고 평북노회를 대표해서 평양이나 서울에서 열리는 장로교 총회에도 참석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기미년 3·1운동 때 기독교 대표의 한 사람이 되었다.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33인의 서명순서를 두고 종파끼리 대립이 있었다. 서로 자기 종파의 대표가 먼저 서명해야 된다고 옥신각신 할 때 그 자리에 들어선 이승훈은 그 사실을 알고 노여워했다. “순서는 무슨 순서야. 죽는 차례인데 아무나 먼저 쓰면 어때. 손병희를 먼저 써요”라고 소리치는 통에 두 말 없이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승훈의 기독신앙정신에 힘입어 오산학교에서는 그 후, 주기철, 함석헌, 김주항, 한경직 같은 이들이 잇달아 나왔다. 오산학교에 이처럼 기독교 정신에 처음으로 불을 붙인 사람은 류영모였다. 그러나 정작 류영모는 자신이 오산학교에 기독신앙을 옮긴데 대해서는 전혀 자랑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부끄러워하였다. 거기에는 깊은 뜻이 있었다.

“나는 공부를 안했어요.열여섯 살부터 일흔 살이 된 지금까지 50여 년 동안 성경을 읽었어요. 20대에 전도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멍청한 일이지요. 나는 사람에게 전도해야 한다고 교회에서 듣고 배운 대로 녹음기 노릇을 했어요. 내 생각으로는 소학교 선생도 마흔 살이 넘어서 했으면 해요. 서른 살 전에 무슨 인생을 알아요? 교육은 인생을 알고서 지도해야지요.”

여기서 류영모에게 참사람의 모습을 보게 된다. 흔히 자기가 한 작은 일도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자랑하기 쉬운 게 사람인데, 류영모는 오산학교에 기독신앙을 전파한 것을 자신이 20대에 뭘 알지 못하고 멍청한 일을 한 것이라고 말한다.

 

 

 

전통신앙에서 이탈하다

 


류영모는 오산학교에서 나올 때 교회생활에서 벗어난다. 하느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 교회생활을 떠난 것이다. 즉, 타율적 신앙에서 자율적 신앙으로 바뀐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쓰면 자연히 기독교계에서 큰 논란이 있을 줄 안다. 옛날에 류영모라는 사람이 그랬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면서 기독교교리에서 멀어졌다. 바울신앙에서 예수신앙으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 첫째는 톨스토이의 영향이고 둘째는 불경과 노자, 셋째는 아우가 죽은 일이다.

 

톨스토이는 류영모가 오산학교에 부임한 지 한 달이 된 1910년 11월 7일 5시 5분에 숨졌다. 톨스토이의 죽음은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대 사건이었다. 아내 몰래 가출하여 방랑길에 나섰던 여든 두 살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기차여행 도중에 급성 폐렴에 걸려 아스타포보(지금의 톨스토이역)광장 관사에서 숨진 것이다. 이 일은 오산학교에서도 추도식을 가질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오산학교에서 실질적인 교장역할을 하던 여준이 도산 안창호의 지시에 따라 만주로 떠나고 새 교장으로 평양신학교 교장이었던 로버트가 취임하면서 학생들을 기독교 신도로 만드는데 초점을 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 오산학교는 비정통 기독신앙으로 반교회 기독교라 할 수 있는 톨스토이의 사상이 학교 안에 갑자기 퍼지고 있었다. 춘원 이광수는 톨스토이가 쓴 「통일복음서」로 설교했는데 교장의 방침과 달라 결국 오산학교에서 쫓겨났다. 류영모가 학교를 떠난 것도 로버트 교장의 학교 운영방식 때문이었다. 그의 가족들의 말에 따르면 한국전쟁 때 거의 없어졌지만 그가 지니고 있는 책 중에 톨스토이의 저서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저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많은 노동자가 쓰레기를 나르거나 뒷간 청소하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요, 동포들이 그것을 치우고 나르도록 뒷간통, 쓰레기통을 채우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허름한 신발을 신고 손님으로 간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신발 없는 이들의 옆을 고급구두를 신고 지나가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외국이나 최근의 일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빵을 먹으면서 빵을 만들 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더럽혀진 손을 가진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손바닥에 굳은살이 없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오산학교에서 류영모는 여준 신채호 등의 권유로 노자와 불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다른 종교에 눈을 뜨게 된다. 그즈음 아우 영묵이 죽었는데 그 일로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고 성공한다는 교회 교리에 회의를 지니게 된 것이다. “내가 스물한 살 때 열아홉 살 동생이 죽었어요. 낙심이 되었지요. 그때부터 나는 세상에 완성이란 없다고 생각했어요.” “종교의 핵심은 죽음입니다. 죽는 연습이 철학이요, 죽음을 없이 하자는 것이 종교입니다. 죽음의 연습은 영원한 ‘얼생명’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요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에요. 산다는 것은 육체를 먹고 정신이 사는 것입니다. 몸으로 죽는 연습은 ‘얼생명’으로 사는 연습입니다.”

 

 

 

일본 유학을 포기하고 뜻을 세우다(立志)

 

그 당시 한국에는 대학이 없었다. 대학공부를 하려면 일본으로 가거나 미국, 유럽으로 가야했다. 류영모는 경제적 부담이 덜 되는 가까운 일본을 택했다. 그때 한국인 학생들이 일본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비학교를 거쳐야 했다. 한국의 학제와 교육이 부실했기 때문이다. 인문분야를 공부하려면 정칙(正則), 과학 분야는 물리학교를 다녀야했다. 류영모는 과학 분야를 전공하고자 동경물리학교를 선택했다. 그것은 오산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쳤고 오산학교에서도 과학교육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식으로 대학을 진학하려면 물리학교를 마친 뒤 시험을 쳐서 대학에 입학해야하는데 류영모는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종교사상 때문이었다.

 

류영모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세상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이니 이런 것 다 집어치우고 진리 속에 들어가는 것만이 참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참 인생은 없어요. 육체를 버리고 세상을 버리는 것이 바로 믿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릅니다. 세상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이 걸어오십니다.대학, 대학하면서 대학에 가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이 생각하는데 대학이 사회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망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대학 때문에 사회악이 조장되지 않아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 때문에 범죄가 더 심해지고 그런 사회악이 더 눈에 띄지 않아요? 모르기는 해도 오늘날 교육하는 사람가운데 공부 잘해야 이다음에 잘 먹고 잘 살게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도 좋은 음식, 좋은 집, 출세 같은 것이 권학(勸學)의 조건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박사논문은 빌어먹을 짓입니다. 나는 대학을 반대합니다. 출세하여 대학교수 된다고 하는 것은 일하기 싫어서 하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성경에도 교만한 자는 일하지 않고 밥 먹으려 한다고 말했어요. 개인의 편한 것을 생각하면서 나라 생각한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지식을 취하려 대학에 가는 것은 편해보자 대우받자 하는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은 양반사상, 관존민비(官尊民卑)사상입니다.”

관존민비를 뒤집는 민존관비(民尊官卑)의 씨알사상이 여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 씨알사상이야말로 공산주의사상이 붕괴되고 자본주의사상은 한계에 다다른 지금시대에, 인류가 공존공영을 향해나가고 있는 21세기에 새 역사를 이루는 머릿돌이 될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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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락경 목사
개신교 목사. ‘맨발의 성자’로 불렸던 이현필(1913~64)과 류영모의 제자인 영성 수도자이다. 30년째 중증장애인들을 돌보는 사회복지가이자 유기농 농부 겸 민간요법계의 재야 의사. 군인으로 복무했던 강원도 화천에 터를 잡아 1980년부터 시골교회를 꾸려가면서 중증장애인 등 30여명을 돌 보는 한편 유기농 된장과 간장을 만들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이메일 : sigolzzi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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