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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는 목사의 성장주의적 목회는 신성 모독

한종호 2011. 06. 29
조회수 12173 추천수 1

사회적 명성과 교회 크기 등 ‘육신의 잣대’ 중심
자신들이 만든 예수로 호위병 삼고 예수 몰아내

 

과연 이 시대가 요구하는 목회자상은 무엇일까? 한 때 일간신문의 ‘종교계의 영파워’, ‘프로들이 선정한 우리 분야 최고’란 제목을 단 기사에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이른바 ‘잘 나가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명단과 그 이력을 소개하고 이들이 한국교회의 좌표인 양 언급했다.
그러나 대체로 그 기준은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한국사회의 보수화에 일조해 온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회의적이다. 시대적 사명에 대한 일깨움보다는 보수적 기득권을 보존하는 신학과 논리로 일관해 온 인물들이 지도적 위치에 있는 모델로 인식된다면, 한국교회, 그리고 한국사회의 장래는 더욱 암담해질 수밖에 없다.

 

사회적 명성과 교회의 크기 등 ‘육신의 잣대’가 중심

 

도대체 어떤 설교를, 무슨 방향을 가지고 해왔는지, 그리고 그러한 ‘말씀’들이 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헤아려봄이 없이, 한국사회의 기득권이 만들고 있는 이른바 ‘명성’에만 의존하는 방식은 새롭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이루기 위한 좌표 설정에 계속해서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의 현실이 안팎으로 비판과 성찰의 목소리에 부대끼고 있는 때에 이 문제는 실로 중대하다. 한반도의 상황이 이처럼 엄중한 시기에, 교회가 시대적 통찰력을 가지고 바른 인식과 바른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본질적인 책무이다.

 

 그러나 이 책무는 외면한 채, 보수적 기득권을 지켜내기 위한 주도권 쟁투만이 무대 전면에 드러나고 있는 현실이다. 양식 있는 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개혁을 외치는 소장 목회자들은 좌절하고 있다. 그러면서 교회는 이 사회에서 가장 이기적인 집단으로 변모하고 있지만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위기이다.

 

아무리 그 사회가 험난한 형편에 놓여 있다 해도, 정신적 좌표가 분명하고 이를 근거로 한 사회적 의지가 뜨겁다면 그 사회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사회적 명성과 교회의 크기, 교회 정치 내에서의 영향력 등 ‘육신의 잣대’가 중심이 되고 있는 현실은 선한 의지에 상처를 주고, 새로운 뜻을 품은 젊은이들에게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과 환멸을 낳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는 한국교회의 장래에 자신감을 갖기 어려울 뿐더러 예수운동의 근본으로 돌아가, 생명력 충만한 현실을 만들어낼 수도 없다.

 

예수님이 성전 뒤집어놓고 강도의 소굴이라고 한 까닭

 

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의 시대를 장악하고 있던 이스라엘의 교회들은 그 시대를 구하는 데 실패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교회가 구원의 장애가 되어버린 것이다. 엄청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오죽했으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본산(本山)인 성전을 화들짝 뒤집어놓으시고는 ‘강도의 소굴’이라고 했을까?

종교지도자들이 강도떼가 되어버렸다. 이 강도의 소굴을 지배하고 있던 이른바 지도자들을 향해 그분은 ‘회 칠한 무덤’ ‘교만한 위선자’라며 독설을 퍼부었다. 속은 온통 썩어 있으면서 그걸 가리느라 창백한 화장을 한 자들이란 의미였다.

 

이것은 예수에게 십자가를 강요하는 빌미로 작용했지만, 예수께서는 결코 그 뜻을 꺾지 않으셨다. 만인에게 열린 집을 소수가 독점하는, 그래서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삯군 목자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무서운 일갈이 아닐 수 없었다. 소위 지도자들의 위선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판국이 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예수를 반길 한국교회는 없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에 나오는 대심문관의 대목처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교회가 정작 예수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예수를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예수를 몰아내고 있으며 그로써 자신들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자신들이 만든 예수’를 자기들의 호위병으로 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 이름 앞세워 탐욕 채우고 있던 교회의 현실에 ‘불과 칼’

 

힘없는 백성들과의 관계에서는 그리도 다정하고 따뜻한 모습을 지닌 그분이 이들 예루살렘의 세력들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보여주신 면모는 실로 ‘불과 칼’ 그 자체였다. 그러기에 주님은 “내가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나는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양심이 이리저리 헤집어지는 자들은 그야말로 그분을 속히 제거하지 않으면 위기가 닥칠 것이라 두려웠을 것이다. 그분이 짧은 전 생애에 걸쳐 도전했던 문제 중 하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탐욕을 채우고 있던 교회의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 교회의 현실은 21세기 한국 땅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예수께서 무너뜨린 것을 교회가 주워 담아 ‘건축’하고 있는 꼴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들이 깊은 회개 가운데서 눈뜨기를 갈망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번번이 실망하고 만다. 그 실망은 매우 깊었다. 돌같이 굳어진 마음과 탐욕에 물든 영혼으로는 더 이상 교회 개혁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는” 세대이며,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품듯이 몇 번이나 이들을 품으려 했지만 이들은 원치 않았다”고 탄식하셨다. 그러고는 “너희의 집은 버림을 받아 황폐하게 되리라”고 예언하셨다.

 

허망한 교리와 종교적 협박으로 약탈한 권세 누리기에 바빠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선포 앞에서 목이 곧은 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급기야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나왔고, 또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며 무섭게 질타하셨다. 이 폭풍 같은 말씀은 사실상 교회가 진정으로 살아나기 위해 귀기울여 들었어야 할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그런데 이 말씀 앞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하며 옷을 찢고 가슴을 친 교회는 없었다. 자신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약동하는 위선과 이중성으로 스스로를 곤고한 자로 고뇌했던 사도 바울의 마음을 품지 않은 교회들은, 그리하여 여전히 강도의 소굴로 남게 되었다. 양을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양 가죽을 벗기는 자들이 교회의 머리 노릇을 하고 있으니 예수께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으셨던 것이다.

 

그러니 이들은 영적 폐허의 현장으로 변해버린 엘리의 실로처럼 “그 제사장의 종이 살이 세 개 달린 갈고리를 들고 와서 냄비나 솥이나 큰 솥이나 가마솥에 갈고리를 찔러 넣어서, 그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제사장의 몫으로 가져가는”(삼상 2:13-14) 타락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이러한 현실을 상대로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그리하여 ‘십자가의 형극’이 아닐 수 없었다. 오욕스러운 기득권을 고뇌의 대상으로 삼지 않은 교회는 탐욕으로 몸을 불렸고, 그 영혼은 전혀 곤고하지 않았다. 허망한 교리와 종교적 협박으로 속이고 약탈한 권세를 누리기에 바쁜 몰염치한 이들의 성채가 되었던 것이다. 이 성채의 주인들이 교회의 지도자로 떠받들어진다면, 교회는 이들의 탐욕을 채우고 사회적 명성을 지켜내고 진정한 믿음을 가진 이들을 끊임없이 시험에 빠뜨릴 뿐이다.

 

 게으르고 구태의연한 성서해석으로 신앙 성숙 방해

 

교회 지도층을 둘러싸고 최근 일어나고 있는 여러 불미스러운 문제들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교회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몸둘 바를 모르겠다. 교회의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성장주의적 목회와 지도자들의 윤리적 부패, 변칙적인 세습, 신학적 피상성과 인기위주의 강단을 직시하면 얼마나 무서운 신성모독(神聖冒瀆)의 죄스러운 강이 흐르고 있는지 경악할 일이다.

교회의 재물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분쟁과 소문은 끊이지 않고, 교회 지도자들의 도를 넘어선 교권주의는 사회정의와 윤리를 내팽개치고 기득권에 기대어 교회를 자신들의 왕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또한 게으르고 구태의연한 성서해석으로 신앙의 성숙을 갈망하는 믿음을 얼마나 권태스럽게 만들고 있는가? 이런 상태에서 교회는 생명의 활력을 줄 수 없다. 종교적 교리와 교회주의적 의무 요구로 무장한 집단이 되어갈 뿐이다.

 

질타는 할 줄 알지만 위로하는 능력이 없고, 강단은 화려한 미사여구로 가득하지만 정작 자신의 죄는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믿음은 깊으나 기득권은 버리지 못하는 모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순결하나 무지하고, 너그러우나 필요한 때의 용기는 없으며, 점은 치려 하지만 시대를 위한 예언은 없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사랑이 풍요한 듯하지만 희생과 오해, 그리고 모욕이 불가피하면 뒷걸음질치고, 대세는 읽으나 좁은 길은 가지 못하는 ‘능력은 없고 말 많은’ 집단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싸움과 힘겨루기, 상석 앉기와 특권 누리기 일삼는 죄

 

그러다 보니 십자가는 견본일 뿐이요, 어떻게든 십자가 지는 일은 마다한다. 십자가로 상징되는, 세상 대세와 세상 권력과의 대결은 이미 포기해 버린 지 오래다. 이런 와중에 갈채와 환호는 즐기지만 예언자의 고독한 위엄은 한사코 선택하지 않는다.

예언서는 펴 들어 읽지도 않는다. 그러기에 우리 개신교는 입을 열면 모두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귀기울이는 지도자를 가지지 못했다. 백년이 넘은 개신교 역사가 도달한 지점이 이렇다면 이 얼마나 절통한 일인가?

 

교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을 몸으로 삼는 현장임에도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육신의 탐욕과 헛된 망상들이 그 몸을 대신하고 있다. 그러는 동안에 교회는 쓸모없는 싸움과 힘겨루기, 그리고 상석에 앉기와 특권 누리기를 일삼는 현장으로 변모하는 죄를 서슴없이 범하고 있다.

새싹과도 같은 미래의 영적 지도자들이 이로써 얼마나 깊은 좌절과 환멸, 그리고 너무 이른 순응을 배우고 말았는가? 이는 한국교회의 장래와 민족의 앞날에 또 얼마나 큰 병환을 키우는 일이 될까? 교회가 질병의 치유처가 아니라, 질병 자체가 되고 있다면 이는 실로 비극이다.

 

지금 우리는 다리가 되어 달라면 다리가 되어 주고, 심장이 되어 달라면 심장이 되어 주고, 눈이 되어 달라면 눈이 되어 주며, 입과 귀가 되어 달라면 그 입과 귀가 되어 주는 몸 된 신학과 신앙을 갖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기득권을 누리는 교회의 현실로서는 하나님나라의 일꾼이 되는 일이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됨은 기득권을 한없이 버리는 일이며, 그 버림은 또한 결코 내세우지 않는 작업을 포함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오늘날 한국교회의 지도층들은 자신의 이름을 앞세우기에 바쁘고, 그로써 개인적 명망 쌓기를 위한 즐거움에 빠져 있다.

 

신도 위에 군림하고 세뇌함으로써 지배하는 덫에 빠져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은 당대의 목자들이 양을 털어먹는 것에 분노하셨고, 그래서 새로운 목자를 보내시겠다고 선언하신다. 이것은 다만 에스겔 시대의 말씀으로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바로 이러한 모습으로 신도들에게 군림하려는 유혹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되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 목자가 할 일은 “헤매는 것은 찾아오고 아파하는 것은 감싸고, 부러진 자들은 싸매는” 그런 사랑의 능력을 뿜어내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릴 용기가 충만한 모델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양들의 희생은 요구되지만, 목자들의 희생은 거부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은 ‘삯군 목자’와는 달리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목자상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말씀에 따라 인간의 아픔을 치유하고 구겨진 영혼을 되살리는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랑의 능력이 충만하게 느껴질 때, 교회는 진정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교회는 단지 성서적 지식과 교회적 습관, 그리고 현실에 대한 심리적 도피처의 구실 이상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지금 이런저런 아픔으로 병들어가고 있는 교회가 가야 할 길은, 수 십 년 동안 깔고 누웠던 누추한 병석(病席)을 들고 일어나 힘차게 앞으로 나가는 일이다. 그렇지 못할 때 교권은 신도 위에 군림하게 되고 그 정신세계를 세뇌함으로써 지배하는 덫에 빠지게 된다.

 

강한 자 죄는 덮어 주고, 약한 자 죄는 꼬치꼬치 캐내 죄의식 불어넣어

 

그런데 이러한 개신교의 현실에 대하여 깊이 아파하고, 공론화해 나가는 작업 자체를 ‘은혜롭지 못하다’며 제동을 거는 요소가 개신교 내부에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제동을 거는 이들은 결국 교회의 죄를 계속 은폐해 나가는 일에 협조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일임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약한 자의 허물은 덮어 주고, 강하고 악한 자의 죄는 폭로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일진대, 교회는 거꾸로 강한 자의 죄는 덮어 주고, 약한 자들의 죄는 꼬치꼬치 캐내어서 자책과 죄의식을 불어넣는 일을 다반사로 저지르고 있다. 이러니 교인들의 기력은 쇠해지고 주눅이 들어간다. 권위주의의 노예가 되어, 교회에서마저도 지위 놀음이다.

 

이것은 나사렛 예수께서 하신 사역과 정반대의 일이다. 예수님 시대 당대의 교회와 그 지도자들의 모습을 회칠한 무덤이라 하시면서 그 속을 뒤집어 보이신 것이 주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원인 중의 하나였다. 몇 십억, 몇 백억 원짜리 성전건축을 나서서 하는 교회를 향해서 오늘도 예수께서는 “돌 하나에 돌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일갈하지 않으실까 적이 걱정된다.

제자들이 성전의 외면적인 화려함에 취하고 있을 때 그분은 무너지고야 말 성전 체제의 운명에 대하여 일깨워 주셨다. 그것이 무너져야, 살아날 것이 산다는 말씀이었으리라. 살아날 것이 살아나려면, 죽어야 할 것이 죽어야 한다. 그 죽어야 할 것에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끼어 있다는 생각을 평신도들이 하고 있다면, 이는 누군가의 모함일까?

 

정직하고 의로운 교회들도 침묵하면 ‘미필적 고의’

 

물론 그렇지 않은 수많은 양심적이고 희생적인 목회자들과 교회가 있다. 그러나 그런 현실이 이름 있는 교회 지도자들의 죄를 정당화해 주는 것도 아니며, 회개의 기회를 박탈해 버릴 ‘은폐의 윤리’를 적용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또한 그런 정직하고 의로운 교회들이 이런 죄를 폭로하고 함께 통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의 죄를 더욱 깊게 하는, 이른바 ‘미필적 고의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라, 그렇지 않은 교회도 있다’는 말은 그 전제가 분명해야 한다. 교회의 죄 앞에 침묵하고 있는 교회는 죽어가는 영혼의 문제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교회이며, 그로써 선교의 과제를 포기하고 있는 교회일 뿐이다.

 

‘은혜롭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의와 선하심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우리에게 감사가 넘친다는 증언과 고백이 아닌가? 그런 것에는 별 관심이 없고, 단지 개인적인 성취에만 주력하면서 묵상이나 영적 감동을 신앙의 주제로 삼아 이기적인 모습으로 치장하고 있다.

‘은혜’라는 말이 사회적 변화에 영향력을 깊이 미치는 기독교 신앙의 능력에 적용된다면 뭐가 잘못 되기라도 한 것일까?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증언하라” 하신 예수 선교의 목표는 기본적으로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이다”의 기원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시대,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할 하늘의 소명을 감당하려 하지 않고, 교회 안에서만 안주하려는 것은 이기적 신앙의 표본이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저울추에 올라서면 어떨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달아보시는 저울추를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추에 자신을 얹어 그 무게를 재보고 만족해 하거나 불만족해 한다. 정작 중요한 저울추의 존재는 잊고 있는 것이다. 깃털보다 가벼운 마음도 달아보시고, 바다보다 깊은 마음도 달아보신다.

그렇다면, 오늘날 내로라하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저울추에 올라서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의로움의 무게는 어느 정도 나갈까? 사랑의 무게는? 정직과 성결함의 무게는? 그 추의 무서움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한국교회는 자기가 세운 척도로 자기를 잴 것이다.

 

이렇게 되어버린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기독교 신앙이 의롭지 못한 현실과 대결하는 자세를 버린 탓이다. 십자가는 의롭지 못한 세상과의 대결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예수께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셨다면 십자가는 그분의 운명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께서는 가는 곳마다 말썽을 일으키셨다. 안식일의 규례를 어기는가 하면, 내로라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민중들의 면전에서 그 권위를 납작하게 만들었고, 성전에 들어와 종교의식에 필요한 물품을 팔고 있을 뿐인데 소란을 피웠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하나님 나라의 주춧돌이 될 것이라면서 기존 질서를 뒤집는 듯한 위험천만한 발언을 하기 일쑤였고, 몰고다니는 무리들은 무식하고 가난하고 병든 예루살렘 지배자들이 보기에 이른바 불가촉 천민급에 속한 이들이었으니 당시 사회의 지배자들로서 이런 자를 누가 그냥 내버려둘 수 있었을까?

 

교회는 일체의 권위주의적 자세와 장치를 털어내야 한다. 나사렛 예수께서는 자신의 발로 삶의 현장에 들어가셨고, 사람들과 하나로 섞이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생명의 법칙이다. 이 법칙이 온몸이 되는 교회, 온 존재가 되는 지도층, 그것이 한국교회의 장래에 순교적 헌신을 하는 이들의 모습이어야 한다.

이걸 가볍게 여기면, 한국교회의 수명은 나날이 짧아져 갈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신앙이 단명해서야 되겠는가? 진정, 한국교회의 내일을 위해 우리 모두 헛 껍데기를 벗고 진실의 옷을 입을 일이다. 그로써 참으로 채워야 할 바를 채우는, 성령의 역사, 그 바람에 한껏 취한 교회가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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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
목회자로서 기독교계의 <오마이뉴스>로 불리는 <뉴스앤조이>를 창간했으며, <씨알의 소 리>와 함께 민주화의 횃불이었던 <기독교사상> 주간이다. 오랜 신뢰를 바탕으로 깨어있고, 활력과 여유가 넘치는 이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는 마당발이다.
이메일 : han02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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