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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또 한해를 살아냈다

정경일 2019.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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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저문다. 남은 날은 적고 아쉬움은 많다. 사회적으로 유난히 고단했던 한 해였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지지부진했고, 3.1운동 100주년에 일본 아베정권으로부터 경제보복을 당했고,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은 다섯 해가 지나서도 답보상태였고, 검찰개혁을 둘러싸고 진보와 보수가 격돌했고, OECD ‘최악’ 목록들은 ‘최장’이 되어갔고, 소득 및 기회 불평등 격차는 좁혀지지 않았고, 여성혐오, 소수자 혐오는 모질고 사나웠고, ‘헬(hell)조선’에 절망한 청년들은 ‘탈(脫)조선’을 욕망했고, 매일 세 명의 노동자가 ‘퇴근’하지 못했다.


   사회현실이 이런데 개인의 삶이 평화로울 수 있겠는가? 나 개인적으로도 정신 역량과 관계 용량의 한계로 인한 무력감에 시달리며 겨우겨우 버텼던 한 해였다. 이 세상에 평안히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최소한 반반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유유상종인지 내 가까이엔 몸과 마음이 지쳐 있는 이들이 더 많다. 이것이 나의 개인적 경험만이 아니라 사회적 증상이기도 하다면 우리는 ‘집단 소진’을 겪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답답한 마음으로 지난 한 해를 돌아보니 여기저기 거칠고 뾰족한 돌투성이다. 숨이 막힌다. 그런데 마음을 가라앉히고 바라보니 그 돌들이 선처럼 이어지면서 길을 만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렇다. 돌짝길도 ‘길’이다. 위태롭고 험한 돌투성이지만 그 길이 있어 우리는 비틀거리면서도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다.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이 길이고 우리는 그 길을 터벅터벅 걸어온 여행자들이다. 이렇게 한 해의 사회적, 개인적 삶을 길 위의 여행으로 생각하니 막혔던 숨통이 조금 트인다.


   여행길엔 기쁨과 즐거움만 있는 게 아니라 불편도 있고 불안도 있다. 때로는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이나 여행 중에 만나는 이들과 불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행이 끝나갈 즈음이면 딱딱했던 몸과 마음이 부드러워지면서 자신과 타인에게 너그러워진다. 여행 마지막 날에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보는 풍경, 먹는 음식, 나누는 대화는 평화롭고 아름답다. 이 때의 너그럽고 선한 마음가짐이 지나온 여정의 성격과 의미를 결정한다. 여행 중에 겪었던 불편과 불안과 불화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되고 작은 기쁨과 친절은 큰 감사의 이유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여독이 아직 남아 있는 채로 다음 여행을 꿈꾸는 것이다.


   이제 며칠 남지 않은 한 해 여행을 어떤 마음으로 마무리해야 할까? 멜로디 비티는 “감사는 과거를 이해하게 해주고 현재에 평화를 가져다 주고 미래의 비전을 만들어 준다”고 한다. 한 해 여행길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아보니, 뜻밖의 선물 같던 기쁨도 감사하고 엄격한 선생 같던 아픔도 감사하다. 나를 넘어뜨려 겸손을 가르쳐 준 한계의 돌부리도 감사하고 다시 짚고 일어날 용기의 지반이 되어준 돌짝길도 감사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거친 여행길 함께 걸어온 도반들에게 감사하다. 모든 것이 감사하다. 올해도 좋은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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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일
세상 속에서 세상을 넘는 사회적 영성을 실천하려 애쓰고 있다.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원에서 참여불교와 해방신학을 연구했고, 현재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도반들과 함께 쓴 <사회적 영성>, <고통의 시대 자비를 생각한다>, <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 등이 있다.
이메일 : jungkyeongi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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