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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독이다

박미라 2018. 06. 15
조회수 4371 추천수 0

‘말 없는 화’ 정신의 생명력 갉아먹어요

남편 사고 치면 침묵 모드 일쑤인 주부 “이제 제 감정 믿지 못하겠어요”


말-.jpg


Q) ‘내 삶의 주인 되기’ 10월20일자 사연을 봤습니다. 그 사연에서는 남편이 입을 다무는데, 저는 상황이 반대입니다. 화가 나면 아무 말도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말도 안 되는 남편의 실수를 보거나 실망스러운 상황을 보면 그냥 입을 딱 닫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제가 화가 나면 좀 무서운지 더 실수를 합니다. 그걸 보면 저는 또 더 화가 납니다. 너무 바보 같고 무식해 보여서 입을 열면 제가 무슨 말을 하게 될지, 어떤 모욕을 줄지 저도 조절이 어려울 거 같아요. 어쩔 땐 내가 너무 쪼잔해 보여서 말하고 싶지 않기도 합니다. 배우자의 실수에 한두 번은 아주 너그럽게 넘어갑니다. 그러다 연타를 치면 화가 납니다. 이렇게 바보였나 싶기도 하고요. 저희는 나이 차이가 좀 납니다. 그래서 뭘 하든, 뭘 사든, 뭘 선택하든 제가 나서야 일이 풀립니다. 어떨 땐 제가 우쭐대지만 어떨 땐 피곤하고, 못 미덥고… 그래서 그가 바보 같고 그렇습니다. 저는 화를 아주 끝까지 내는 거 같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지는 않지만 말없이 끝까지 화를 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혼자 있고 싶다고 과감히 문을 닫아버리지만 그러다 하루 이틀 정도 지나면 화가 가라앉고 그러다 보면 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화낸 것을 사과합니다만 풀리고 나면 제가 그냥 변덕 부린 것 같고 유아적이고…. 그래서 이제는 저도 제 감정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 명진


이번에는 침묵하는 아내가 사연을 보내셨네요. 갈등이 생겼을 때 어떤 감정을 느끼고 또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는 어느 정도 기질적 영향을 받습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다르게 반응하는 건 그 때문일 거예요. 타고난 성격은 원래 바뀌기 어렵지만 불편한 감정을 느끼면 입을 다물고 자기만의 동굴로 들어가 버리는 성향은 더욱 그렇습니다. 명진 님은 그래도 지면을 빌어 자신의 마음을 여셨네요. 변화를 위한 그 용기를 칭찬합니다.


사실 침묵은 상당히 강력한 공격입니다. 침묵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참 무력하고 소극적으로 대응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막상 당하는 사람은 거절과 거부, 그리고 버림받음의 감정을 강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넌 나를 입 다물게 했어, 네가 얼마나 나쁜지 알아? 하는 의미를 던져놓고는 소통할 기회, 해명할 기회를 주지 않으니 그 또한 괴로운 노릇입니다.


너무 자주 버럭 해서 자신의 화를 객관적으로 의식할 수 없게 된 사람과 마찬가지로, 화를 참는 사람도 자기감정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화가 표현되지 않으면 내부에서 소용돌이치거나 요동하기 때문에, 그저 막연하게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게 되지요. 폭발하면 치명적일 거라고 상상하며 스스로 두려움에 떠는 것입니다.


그런데 침묵으로 대처하는 습관이 심각해지면 누구보다 명진 님 자신이 해를 입습니다. 우선 당신이 뭘 원하는지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황은 조정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원망과 화가 더욱 깊어질 겁니다. 입을 다무는 대신 생각이 많아집니다. 당신의 화가 정당하다는 걸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상대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그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괴로운지 하는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화난 이유를 백 가지쯤은 찾아놨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화가 풀리니 그 또한 당혹스러우셨나 봅니다.


감정이란 게 원래 그렇습니다. 어떤 감정이든 예외 없이 왔다가 갑니다. 그러니 어느새 화가 풀렸다고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화가 영원히 풀리지 않는다면 그게 더 문제겠지요.


중요한 점은, 자주 느끼는 감정을 당신 자신이라고 여기면 안 된다는 겁니다. 자주 찾아오는 불편한 손님을 당신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감정도 어찌 보면 내 마음에 찾아오는 손님이며, 당신은 손님을 맞는 주인이지 그가 아닙니다. 그러니 그의 명예를 위해 너무 많은 변명거리를 만들지 않아도 됩니다. 이를테면 남편이 나를 화나게 할 만큼 바보 같고 실수를 많이 한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남편이 바보 같아 보인다는 말씀을 반복하셨지요. 남편을 그토록 마음으로 비난하셨다면 그만큼 자기 비난도 맹렬했겠네요. 저는 그 무엇보다 당신을 괴롭혔을 자기 비난이 염려됩니다. 당신은 자신을 쪼잔함, 변덕, 유아적 등등으로 표현합니다. 추측건대 자기 비난이 두려워 이제까지 실수하지 않으려고, 바보 같지 않으려고 부단히 자신을 다그치며 사셨을 겁니다. 자신의 유능함을 남편에게 과시하며 나는 바보 같지 않다고 잠시 안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보 같은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실 자기 비난입니다. 정신의 생명력을 갉아먹으니까요. 유능함은 타인에게 자주 이용당하지만 미숙한 측면은 타인의 도움을 얻어내기도 하니 무엇이 더 옳은 건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자신을 유능함, 완벽함 안에 가둘 때 다른 부분이 희생당할 수 있다는 걸 명심하세요. 실수하는 바보 같은 측면에는 천진난만함이나 자유로움, 낙천성, 직관력 등의 긍정적 측면이 연결돼 있습니다. 실수를 막으려다 자칫 자신의 긍정적 측면이 질식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화의 뿌리는 거기에 있을 겁니다. 나 스스로 나를 가두고 억압하는 곳 말입니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유아적이고 속 좁은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입을 자물쇠로 채울 때마다 다른 한편에선 분노가 자랐을 겁니다. 나도 말 좀 하자고, 난 수치스러운 존재가 아니란 말이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고! 하면서 말이지요.


서툴게 화내도 괜찮습니다. 붉어진 얼굴로,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말해도 괜찮습니다. 속 좁은 생각이어도 괜찮습니다. 화를 느낌과 동시에 입을 다무는 자신을 지켜보면서 한두 마디의 말이라도 꺼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보세요. 답답해, 속상해, 한심해, 내가 지친다, 같은 말도 괜찮습니다. 말하기를 반복할수록 감정은 여유를 찾을 거고, 표현은 조금씩 능숙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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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라
심신통합치유학 박사다.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편집장, <여자와닷컴> 콘텐츠팀장을 지냈고, 마음치유학교에서 ‘치유하는 글쓰기’ 프로그램을 안내중이다. <천만번 괜찮아>, <치유하는 글쓰기>, <완벽하지않아도 괜찮아>등의 저서가 있다.
이메일 : blessm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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