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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지 않는 죄

법인 스님 2012. 0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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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 만약 그에게 열정이 없었다면 그는 한낱 양치기 목동에 불과했을 것이다"

연노랑연둣빛으로 싱그러운 새싹을 틔우는 어느 봄날, 호남선 열차 차창 너머 부드러운 풍경에 무심의 평온을 마음껏 누리고 있던 나는, 어느 증권회사의 텔레비전 광고 한 줄에 모골이 오싹해졌다.

 

이토록 엄청난 선언이 젊은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웠다. 주변을 둘러보니 승객들의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무관심일까? 아니면 무언의 공감과 동의일까? 나는 목적지에 이르는 내내 오늘날까지 인류역사가 예찬하고 있는 징기스칸, 혹은 나폴레옹의 그 '열정'과 대다수 사람들이 그저 쉽게 동의하는 '한낱 양치기 목동'이라는 말에 대해 거듭거듭 사유했다.

 

그리고 이후 법회와 강의장에서, 사적인 모임에서 이 광고의 구절을 말하며 소감과 판단을 구해보았다. 대체로 다수의 사람들은 내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침묵했다. 몇 사람은 옳은 말이라고 했다. "나는 그 광고의 한 구절을 동의하지 못합니다. 나는 그 한 구절의 사고를 반성하고 수정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역사는 과거의 오류를 이어 미래에도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강한 문제제기에 비로소 몇 사람이 한참을 생각하고서 말했다 "아하! 그렇군요. 그 열정이란 정복과 천하통일이라는 명분 아래 전쟁과 살상의 '욕망'일 수 있겠군요. 그리고 양치기 목동에게 '한낱'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옳지가 않군요. 노동과 노동하는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폄하하고 있군요."

 

이후, 생각해 보았다. 거의 유전자와도 같은 이러한 집단인식의 전이에 대해. 그리고 얻은 결론은? '사람들은 그리 깊게 생각하며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장의 어떤 사안에 대해 분석하고 비교하며 손익을 '계산'하고, 자신의 이해관계와 감정에 따라 불신하고 '의심'은 할지언정, 결코 근본의 이치를 헤아리고 삶의 방향을 세우는 '사유'는 하지 않고 사는 것 같다.

 

즉, 정보의 분석은 있을지언정 존재의 진실과 사람의 바른 도리에 대해서는 그리 생각하고 살지 않는 것 같다. 사유! 모든 종교를 통틀어 불교만큼 사유를 으뜸가는 실천덕목으로 강조하는 곳도 없을 것이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늘 많이 듣고(聞), 그에 대해 깊이 의미를 헤아려 보고(思), 그것이 진리에 합당하다고 확신이 들면 실천하라(修)고 가르치셨다. 또한 열반에 이르는 성스러운 여덟 가지 실천수행에서는 바른 안목(正見)과 바른 사유(正思維)와 바른 통찰(正念)을 말씀하셨다. 당시 제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서 나무 밑에서, 혹은 탁발하는 여정에서,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가르침의 의미를 깊이 사유하고 음미하며 진리 체험의 희열에 젖었으리라.

 

그렇다면, 왜 그토록 곳곳에서 사유의 힘을 역설했을까? 그것은 사유가 곧 진리를 증명하는 첫걸음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참된 이치에 호흡하여 살 때 우리 모두는 행복과 평화를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부처님은 늘 제자들에게 거듭 사유하고 사유하여 가야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확립하라고 가르치셨다.

 

사유의 필요성에 대한 하나의 사례를 살펴보자. 부처님 당시 많은 종교와 사상가들이 백가쟁명하면서 저마다 자기들만이 최고가는 진리이고 고통에서 구제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부처님께 찾아가서 여쭈었다. "모두들 자기들만이 진리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대체 누가 옳고 누가 옳지 않습니까?" 이때 부처님은 누가 옳고 그르다고 답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대략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씀하셨다. "절대적 권위를 가진 명망 있는 사람이 말했다고 해서, 옛날부터 전승되어 왔다고 해서 진리라고 할 수 없다. 먼저 깊이 숙고하라. 그것이 이치에 맞는지를, 그리고 그들의 주장이 모든 사람들의 무지와 욕망을 제거하고 해탈 열반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인지를, 그러면 나는 그것을 진리라고 승인한다. 설령 내가 말했다고 해서 진리라고 결정짓지 말라. 나의 말도 의심하고 헤아려 보아라"

 

그렇다, 믿음 이전에, 실행 이전에 전제되는 것이 바로 사유이다. 그렇기에 이치에 합당하기에 믿고 성찰하는 것이며, 행복과 평화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실천하는 것이다. 사유의 힘이야말로 모든 삶의 방향과 몸짓의 근간이다.

 

그런데 믿음과 명상을 통하여 수행하는 신도들에게서 오히려 진정한 사유를 하지 않는, 혹은 왜곡된 사유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무사유와 왜곡된 판단이 비합리적이고 반생명적인 역사를 만들어낸다. 중세시대 면죄부 판매가 그렇고, 죄없는 여성을 무수히 화형으로 죽인 마녀사냥과 현대의 휴거 소동이 그렇다. 예수님이 최고의 선으로 전파한 가르침이 무엇인가? 모두를 평등하게 보듬는 사랑의 실천이 아닌가? 형제를 궁휼하게 여기는 나눔과 비움의 사랑을 실천할 때 천국의 문은 열린다고 하지 않는가? 지극한 상식으로 판단해 보아도 면죄부와 마녀사냥의 허구성은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런데도 왜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사견에 동의하고 광신적인 만행에 침묵했을까?

 

성직자와 신자들의 '개념없는' 신앙 형태는 오늘의 문명시대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재현되고 있으며 또한 아무런 비판없이 수용되고 있다. 수만 명이 모인 집회에서 '사찰이 무너져라'고 기도하는 목회자들의 발언을 문제 삼지 않는다. 쓰나미와 지진대참사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라고 일어난 재앙이라고 말해도, 그것은 '아니다'라고 말하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는다. 그 말은 듣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논술고사를 통과하여 대학교육도 받았을 것이고, 정보화사회에 매우 논리적이고 비판적 안목을 가지고 있을 터인데, 왜 어처구니없는 비상식에 정상적인 사고가 작동하지 않는 것일까? 참으로 난해한 현상이 아닌가 말이다.

 

문득 모습은 유대인 대학살의 책임자인 아이히만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조사해보니 그는 성장과정도 지극히 평범했고 공무원 생활도 성실했고, 조직의 질서에 충실하는 준법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고, 이웃에서 흔히 만나는 아저씨와 같은 사람이었다고 하였다.(물론 이 객관적 평가로 인해 유대인사회에서 아렌트는 지탄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왜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가? 아렌트는 그가 '사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을 인식하지 못한 채 악을 자행한 경우라고 결론 내렸다. 자기에게 맡겨진 유대인 대학살이 어떤 의미와 결과를 불러오는지를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유의 형식을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조직의 논리와 명령을 성실하게 따르는, 준법과 성실의 사명을 다했을 뿐이다. 아이히만은 세상에서 가장 근본적인 죄, '사유하지 않은 죄'를 범한 것이다.

 

믿음도 자칫 올바른 사유를 마비시키는 오류로 이어지게 된다. 정직하고 진지하게 묻고 의심하면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압박한다. 누가 말했기 때문에 믿어야 하는가? 아니면 헤아려 보니 이치에 합당하기 때문에 믿어야 하는가? 의심하고 탐구하면 믿음은 흔들리는 것인가?

 

명상도 자신과 사회에 대한 사유를 가로 막을 위험성이 많다. 당신은 고요한 곳에서, 세상의 번거로운 일 내려놓고서, 자신의 내면을 철저하게 응시하고 몰입하면서. 잡념과 욕망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안함과 무욕의 자족에 머물면서 미묘한 희열을 경험하게 된다.

 

명상수행은 매우 좋고 의미있는 일이다. 그러나 고요함과 편안함에 갇혀 자신과 이웃의 대한 관심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가. 혹은 그런 관심은 부질없고 세속적 망상이라고 판단하고 있지는 않는가? 나아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세상 삶의 고통과 모순의 인과관계를 분석하고 통찰하는 일이 명상수행에 방해가 되고 분별심을 조장하는 장애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부처님에게로 돌아가 생각해보라. 세간에 대한 분석과 통찰, 그리고 해결방법을 제시하고 실천한 부처님의 삶을 정밀하게 살펴보기를 바란다.

 

올바른 사유, 우리를 행복에 이르게 하는 사유를 위해서는 어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헛된 욕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욕망이 눈을 가리면 정직한 판단이 흐려지고 무지가 욕망을 충동질하여 또 다른 욕망을 낳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음은, 연민과 자애의 눈으로 세상을 정직하게 바라보라. 그 다음은 끊임없이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많은 사람들의 말과 삶에 편견없이 귀 기울이는 성찰을 해야 한다.

 

이미 그대들도 알고 있듯이, "묻지 않으면 진리가 내게로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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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 스님
16세인 중학교 3학년 때 광주 향림사에서 천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대흥사 수련원장을 맡아 '새벽숲길'이라는 주말 수련회를 시작하면서 오늘날 템플스테이의 기반을 마련했다.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과 <불교신문> 주필, 조계종 교육부장을 지냈으며,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지리산 실상사에서 공부하고있다.
이메일 : abcd369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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