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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금강경 오해 20

저지난번 3-2분의 我皆令入無餘涅槃而滅度之라는 해석이 맘에 안 들어 바꿔본다.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인 我는 다 이 我로 들어가는 삶으로써의 남김 없는 열반이며 이 열반의 度로써의 보리가 보리로 消滅작동하는 살타의 이 보리살타이다.’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3-3. 如是滅度無量无數無邊衆生, 實无衆生得滅度者.’

3-3.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고, 가 없는 중생들을 내 멸도한다 하였으나, 실로 멸도를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었어라.’(p169)

- 도올이 애초에 如是라는 말에 대한 이해가 불완전하고 滅度라는 말이 무엇을 표상한 것인지 몰라 이런 엉뚱한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의 如是는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가리키는 말이다. 수보리가 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은 어떤 형상으로 住하는 것이며, 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라고 항복하여 드러난 그 맘은 어떤 거냐고 물었을 때, 석가부처가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은 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라는 ‘이와 같은’ 모양이며, 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라고 항복작동한 ‘맘과 같은’ 그 맘이다.

如是란 말은 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라는 말과 그 뜻으로써의 모양과 그 모양으로써의 작동을 대신한 말이다.

所有一切衆生之類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라는 각각의 성품인 我의 삶이 열반으로써 멸도의 보리살타임을 표상한 말이 如是다.

滅度는 如是로써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이 보리살타를 漢語로 푼 것이다. 즉 度는 是로써 보리로써의 선정바라밀을, 滅은 如로써 살타로써의 작동인 지혜의 반야로 사로잡히는 삼매작동의 바라밀(아뇩다라삼먁?)을 각각 표상한 말이다.

그러므로 如是와 滅度는 같은 것을 가리키는 다른 말이다. 如是滅度는 住로써의 모양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며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으로 항복하는 이 맘의 작동을 표상한 것이다. 따라서 이 如是滅度는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은 총체적 인연·인과로 작동하는 중도·여래·열반의 如是라는 滅度의 보리살타’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3-3의 해석은 ‘이와 같은 보리살타인 무량 무수 무변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라는 이 모든 성품의 삶인 중생은, 실재의 실체랄 것이 없는 중생이므로 멸도로써의 보리살타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풀어야 한다. 그래야 석가여래가 수보리가 묻는 진리의 진실, 곧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의 보리살타에 가까운 설명이랄 수 있는 것이다.

석가부처가 뭐라고 중생들의 고통을 멸도하여 이들을 제도, 구원한단 말인가?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이 진리의 진실로써 부처며 선이라고 알면 뭔 큰 능력의 귀신이라도 되어 저들을 악에서 구할 수라도 생긴단 말인가?

도올은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인 이 진리인식관 아득한 해석을 설명하느라고 정말 아득한 사유의 말을 하고 있다. -

도올은 3-3분을 이렇게 말한다.

‘사실 여기 붓다의 결론이 너무 쉽게, 너무 퉁명스럽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당혹감을 느끼기에 앞서 별 느낌이 없는 무감각 상태로 서 있을 수도 있다. 여기서 과연 붓다는 우리에게 무엇을 說破하려 하고 있는가?’

- 맞다. 도올이 정직하게 말했다. 석가여랜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이 진리의 진실임을 너무 쉬워 잘 보이지도 않고 또 퉁명스럽게 들릴 만큼 수보리의 말을 거의 따라서 말을 해, 대체 이 말이 뭔 말인지 알 수 없어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긴 하다. 그러나 도올이 ‘우리는 당혹감을 느’낀다고 기술하는 건 ‘도도맘’ 같은 얼척없는 말이다. 자기가 당혹감을 느꼈으면 자기가 그렇다고 하면 되지 ‘우린’ 왜 끌고 들어가나? 물귀신인가?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수보리가 묻고 석가부처가 대답하는 이 대화 작동의 형상이며 내용의 뜻으로 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라는 진리의 진실이 넘 쉽고 퉁명스러울 만큼 바르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미처 이것을 바르게 보지 못하여 석가여래가 전하고자 하는 본의를 몰라 엉뚱한 사유의 말을 하는 연기의 실상을 연출해 놓고는 ‘우리’가 다 그걸 못 알아본 무식쟁이라고 싸잡아 몰아넣는 건, 자기가 무식이면 다 무식인 줄 아는 교만이거나, 다 같이 무식으로 끌고 들어가는 물귀신 짓이다.

석가여래의 이 ‘무엇’이 드러난 지는 비단 수보리의 이 물음이나 이에 대한 석가붓다의 대답이 있기 전 헤아릴 수 없는 중중무진의 시·공간으로 이미 다 드러난 과거며 현재며 미래이다. 그래도 이 삼세를 한 꿰미에 꿴 이 ‘무엇’이니 이를 도올이 어떻게 설파하는지 따라가 보자. -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윤회의 굴레를 계속하는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는 많은 중생을 구원할려고 하였다. 아니! 나는 구원하였다. 나는 그들과 더불어 웃고 울고, 같이 위로하고 애통해 하고, 모든 방편을 동원하여 가르치고 또 동고동락하였다. 나는 그들이 그들의 윤회의 굴레의 아픔을 벗어버릴 수 있도록 滅度의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런데 나 붓다의 실존적 깨달음은 滅度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하는 자비행에 있지 아니하였다. 나는 깨달았다. 내가 멸도의 길을 열어준, 그 “열음”의 혜택을 입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을! 實로 나는 아무도 멸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구원 받아야할 자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자비의 삶은 무의미한 것이었는가? 죽도록 열심히 산 나의 버거로운 삶의 수고는 헛짓이었나? 그렇다! 그것은 나의 인식 속에서 전면 부정되어야 할 사태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붓다가 붓다 자신의 자비로운 삶을 부정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과연 붓다는 여기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고 있는가?’

- 도올은 석가여래가 이렇게 설파한 거라고 자기가 석가여래와 수조반조한 빛으로써의 사유의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건 분명 이미 드러난 석가여래의 깨달음의 내용과는 아득한 사유의 말을 도올은 하고 있는 것이다. 석가여래가 설파한 건 이런 내용이 아니다. 석가여래가 뭔 중생을 구원하려 했거나 구원했단 말인가? 석가여래가 ‘그들과 더불어 웃고 울고, 같이 위로하고 애통해 하’는 동고동락의 삶을 살긴 했지만, 뭔 ‘모든 방편을 동원하여 가르치고’ ‘그들의 윤회의 굴레의 아픔을 벗어버릴 수 있도록 滅度의 길을 열어 주’는 자비행을 했단 말인가? 그들을 이만오천명씩 영산에 노상 모아놓고 팽생 이를 멸도한단 대도, 이 일을 언제 완전히 이루어 끝낼 수 있을꼬? 대체 이런 뻔한 구라를 왜 치는가? 석가여랜 이런 구라의 행을 한 게 아니다. 이런 오해, 곡해의 사람들이 득세하여 석가여래의 정신을 죽여 멸도하고 있는 이 세상의 이 사람이, 이 세상의 이 삶으로 열반하고 있는 이 연기의 실상을 바르게 보시라.

석가여랜 중생이란다면 이 중생이, 구원이란다면 이 구원이, 이 동고동락의 이 삶이, 방편이란다면 이 방편이, 윤회란다면 이 윤회가, 자비란다면 이 자비가, 열반이란다면 이 열반이라는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이 오직, 보리살타로써 연기의 실상인 진리의 진실임을 밝혀 증명하는 삶이었지, 이런 것들이 뭔 실재의 실체랄 게 있다고 이런 것들을 찾거나 버리거나 가르치거나 열어주었다고, 석가여래의 깨달음관 아득한 사유의 말을 하는가? 석가여랜 이런 인간적 윤리로써의 관념을 실천하거나 이를 가르친 이가 아니다. 다만 이 인간적 윤리가 인간 삶의 무형인 관념으로써든, 인간 삶의 유형인 실제로써든 오직, 이것이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써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총체적으로 작동하는 중도·여래·열반의 보리살타로써 연기의 실상임을 깨달아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이 진리의 진실로 완전히 이루어졌음으로 오직, 이를 알라고 기도한 이였다. 석가여래는 구태여 이를 깨달아 이 깨달음을 기도한 이였지, 자신의 삶을, 설령 도올이 말한 대로 저 윤회의 굴레에서 그들이 벗어나는 멸도의 길을 가르쳤지만 멸도한 이가 하나도 없어 이를 벗어나는 멸도의 길을 가르친 자신의 삶이 헛것이었다고 깨달아 이런 자신의 삶을 전면 부정하는 이런 상황의 삶은 석가여래에겐 없는 것이다. 언제 석가여래가 이런 삶을 살았단 말인가? 석가여랜 오직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이 이 성품의 삶인 까닭을 한 꿰미에 꿰는 진리인식에 몸부림쳤고, 이를 깨달아 이 깨달음을 기도한 이였을 뿐이다.

금강경을 바르게 보시라. 이 금강경이 다만 석가여래와 제자 수보리와의 일상적 대화의 이야기로 이해하여 해석한단 대도, 석가여래가 수보리의 깨달음을 지도하는 교육적 이야기란 대도, 이것이 보리살타로써 연기의 실상임을 말하지 않는다면 이 금강경은 구태여 금강으로 있을 까닭이 없다. 마치 도올이 이 금강경을 말하되 금강을 말하지 않고 다만 금강으로 말한 대도 이를 금강으로 바르게 보아야 구태여 이 금강경이 있는 까닭의 면이 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건 이렇다 치고, 도올은 ‘실로 멸도를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었던 까닭을 석가여래의 붓다가 이렇게 설파했다고 진리의 진실로 말하니 이를 따라가는 보리살타의 연기의 실상을 바르게 보시라. -

‘나(도올)는 불교를 생각할 때, 아니, 불교를 잉태한 인도문명을 생각할 때, 단 한마디의 말을 떠올린다. 그것은 “윤회의 공포”(the horror of transmigration)! 이것은 비단 불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 윤회없는 삶이란 없다. 윤회란 한마디로 내 삶의 행위가 행위자체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업이 되어 時間속에서 영속된다는 것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요, 그것은 또 하나의 윤회의 삶을 의미한다. ·····. 이 生死의 끊임없는 고리를 이어가는 業은 나의 삶의 도덕적인 행위이다. 善業은 善果를 낳고, 惡業은 惡果를 낳는다. 이것은 회피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윤회만을 엄격히 생각한다면 윤회속에는 인간의 구원의 여지가 없다. 윤회의 영속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業의 存在이기 때문이다. ·····. 산다는 것! 그것은 하나의 비극!

해탈이란 바로 이 윤회의 굴레로부터의 벗어남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브라만계급으로부터 모든 카스트의 사람에게 共通된, 윤회의 공포부터의 해방의 복음이었다. 업과 윤회와 해탈, 이 세가지는 인도문명의 기본 골격이었다. 그러나 윤회로부터의 해탈, 그 복음의 소식은 붓다의 시대를 벗어날수록 특정한 修道人들의 전유물이 되어 버리고, 아라한들의 고행에 가리어 버렸다. ·····. 윤회의 주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業”이다. 그것은 “행위”이다. ·····. 그러면 업의 주체는 무엇인가?’(p171~172)

- 도올은 윤회며 업이며 해탈의 뜻을 자세하게 풀이하며 ‘윤회없는 삶이란 없다.’고 말하여 마치 윤회 업 해탈이 불교의 중심이라고 석가여래가 말한 것처럼 말하는 건 물론 이 윤회 업 해탈이 실재의 실체인 것처럼 말한다. 이 말들로써의 개념이 도올이 말하는 것과 같이 인도문명의 근간임은 물론 모든 삶의 법칙이란 대도 석가여래가 말하는 개념의 법과는 다르다. 석가여래의 사유체계가 인도문명권에 속할 수밖에 없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와 꼭 같은 건 아니다. 바로 그런 사유체계가 실재의 실체랄 것이 없는 보리살타로써 연기의 실상이라는 인식의 사유체계로 혁명한 이가 석가여래다. 우리 인간의 삶은 윤회와 업을 피할 수는 없는 거지만 이 못된 윤회와 업을 해탈하는 멸도의 길이 따로 있음을 제시한 이가 석가여랜 아닌 것이다. 도올이 자세히 설명한 이 윤회며 업이며 해탈이라는 이것이며 이것의 뜻은 실재의 실체랄 것이 없는 것이다. 다만 이 윤회며 업이며 해탈이라는 이것이 이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의 선정으로써 이 선정으로 지혜작동하는 보살로써의 연기의 실상임을 바르게 보아, 그러므로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이 완전 자유며 평화며 자비며 사랑의 진리의 진실이라는 새로운 관념의 생각을 탄생시킨 이가 석가여래인 것이다. 물론 이런 언어문자는 석가여래보다 엄청 먼 후대의 소산일 수는 있어도 이 언어문자가 표상한 이 관념은 석가여래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이 관념의 실제작동은 중중무진의 시·공간이다. 그럼 뭐 저 도올이 말한 ‘윤회의 영속’과 다를 게 없다고?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대여 다만 이 생각이 그대의 머릿속에서 숨어있다 아무 까닭없이 나온 것이 아니라 내 말에 반연하여 생긴 생각임을, 이 작은 당연지사의 연기의 실상에서 거대한 진리의 진실을 바르게 보시라.

도올이 단순히 윤회의 공포로부터 해탈하는 방법의 소박한 소식인 복음을 석가여래가 전했는데 시절이 하수상하여 사라졌다고 말하는 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이 진리의 진실이라는 큰 복음을 전한 이가 아니라, 그야말로 善業은 善果를 낳고, 惡業은 惡果를 낳는다는 인간의 도덕적·윤리적 삶으로써의 소박한 복음이나 전한 이로 석가여래를 아는 것이다. 3000년 전 무식한 시절인데 무슨 그런 큰 복음을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냐고 한다면, 그러나 이런 사유의 말 또한 분명 도올보살에 의한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이라고 말할 밖에 없다. 그 이가 전한 금강의 깨달음은 오직, 이 말일 뿐임으로.

헌데, ‘윤회의 주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業”이다. 그것은 “행위”이다. ·····. 그러면 업의 주체는 무엇인가?’라며 갑자기 이 윤회며 업을 사람의 윤리성을 벗어난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의 선정으로써 독립적 개체로써의 我로 초월작동하는 지혜의 보살임을 도올이 말하려 하는 듯하니 언제 자기도 이 보살임을 실토하는지 따라가 보자. -

도올은 말한다.

‘불타는 무엇을 말했든가? 불타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았다고 하는 無上正等覺은 무엇이었든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핵심은 무엇이었든가? 一切皆苦? 아니다! 諸行無常? 아니다! 涅槃寂靜? 아니다! ·····. 그렇다면 불타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우리가 금강경에서 깨달아야 할 正宗法印인 “諸法無我”라는 것이다. 불교의 핵심은 三法印이 아니요, 바로 “諸法無我”라는 一法印인 것이다.

諸法無我란 무엇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諸法이란, “法”이라 해서 무슨 대단한 “달마”나 “眞諦”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 그냥 “모든 存在”를 말하는 것이다. 法은 存在요,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이다. ·····.

諸法의 法은 ·····, 有爲法과 無爲法 모든 것을 총괄하는 말이다. 유위법이든 무위법이든 存在하는 모든 것은 “我가 없다.”, ·····. 그런데 “我가 없다”함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말하는 我(atman)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나”가 아니다. 그 “나”는 넓은 의미에서의 “我”의 한 종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我란 무엇인가? 그것은 매우 철학적이고도 추상적인 불타의 논리적 깨달음에 속하는 것이다. 평상적으로 “내가 없다”는 그런 상식적 논의가 아닌 것이다. 여기서 我라는 것은 곧 “실체”(substance)를 말하는 것이다. 실체(substance)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래에(sub) 놓여진 것(stance)이다. 즉 현상의 배후에 현상의 존속을 가능케 하는 자기동일체로서의 존재인 것이다. “여기 책상이 있다”고 할 때 참으로 우리가 책상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곧 책상을 실체화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즉 책상을 책상이게끔 하는 고정불변의 존재가 책상의 자기동일체로서 책상속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상의 자기동일체를 바로 우리가 “我”라고 부르는 것이다.

“저기 저 꽃은 예쁘다!” ·····. 이런 말을 할 때 우리는 마치 저 꽃이 있고, 그 있는(存在하는, 我가 있는) 꽃이 아름다움이라는 속성을 구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 과연 그런가! 내일 보면 어떨까? 시들어져 버렸다. 어저께는 어땠는가? 피지도 않았다. 이 순간에는 어떠한가? 과연 저기 저 꽃이 있는가? 그럼 과연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어디 있는가? 그것은 나의 마음의 상태인가? 내가 저 꽃을 감지하는 순간의 나의 느낌인가? 그것은 실체성이 있는가? 과연 저 꽃은 아름다운가? 저기 저기 저 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름답다고 느낀 그 순간에 그 느낌의 대상으로서의 무엇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무엇은 存在가 아닌 나의 느낌을 담아낸 어떤 물체의 조합이었다. 그 물체의 구성요소를 불교에서는 色·受·想·行·識의 五蘊이라고 부르고 그 조합을 假合이라고 부른다. 즉 꽃은 存在가 아닌 五蘊의 假合인 것이다.

·····. 모든 存在는 참으로 存在하는가? 붓다의 무상정등각의 최후의 깨달음은 바로 存在는 存在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諸法은 無我,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다”라는 말로 표현했던 것이다. ·····. 나는 없다! 그 나가 없다고 외치고 있는 붓다라는 我조차도 虛空으로 사라져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 그대여, 바르게 보시라. 다만 이 사유의 이 말은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써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총체적 인연·인과로 작동하는 중도·여래·열반의 보리살타로써 오직, 이 사유며 이 말의 隨照返照로 빛나는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의 선정으로 지혜작동하는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임을 바르게 보시라. 석가여래의 말이래도, 석가여래의 말이라고 말하는 말이래도, 보고 듣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래도, 고개가 가로 저어지는 말이래도, 다만 이것임을 바르게 보아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이 진리의 진실로써 금강임을 아는 진리인식의 깨달음을 격발하시라. 구태여 금강경이 있는 까닭은 오직, 이 일일 뿐임이니. -

도올의 이 말은 그의 사유를 넘어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부터 如來한 초월작동의 보리살타로써 진리의 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올이 다만 석가여래가 인간의 소박한 윤리적 문제를 깨달은 한 인간으로 진술하거나 또 여기서처럼 ‘我(atman)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나”가 아니다. 그 “나”는 넓은 의미에서의 “我”의 한 종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我란 무엇인가? 그것은 매우 철학적이고도 추상적인 불타의 논리적 깨달음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해 석가여래를 헷갈리게 하는 연기의 실상을 보이니, 헷갈리는 이게 바로 진리의 진실이라고 말한 이가 석가여래라고, 도올을 졸졸 따라다니며 필자는 계속 말하는 것이다.

석가여래가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은 무상정등각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無我는 도올의 설명이 부족하니 담에 좀 더 말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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