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서로 마음을 열어 고민과 아픔을 나누고 치유하며 행복을 모아내는 게시판입니다.

도올의 금강경 오해 23

지난번 3-3. 如是滅度無量无數無邊衆生, 實无衆生得滅度者를 ‘이와 같은 보리살타인 무량 무수 무변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라는 이 모든 성품의 삶인 중생은, 실재의 실체랄 것이 없는 중생이므로 멸도로써의 보리살타라고 하는 것이다.’라는 해석했었다. 이를 ‘(보리살타인)이와 같은 멸도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라는 이 모든 성품의 삶은 무량 무수 무변의 중생으로써, 실재의 실체랄 것이 없는 중생이므로 멸도의 보리살타인 것이다.’라고 바꿔본다.

이렇게 자꾸만 이랬다저랬다 하는 걸 용서하시라. 필자가 한문이력이 별무고 가방끈이 짧아 글짓기에 서툰 허접한 지혜작동이니, 이 지혜작동의 허물을 용서로 滅道하시고 다만, 이 사유의 이 말이 연기의 실상임을 바르게 보시라.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p180~185)

3-4.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3-4.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강해] 바로 이 절에서 正宗分은 피크를 이룬다. 이것은 불타의 無我論의 본의로 회귀하자는 보살운동의 캣치프레이즈이기도 한 것이다.

“return to buddha”

역사적으로 대승의 의미규정은 이 한 절에 완료되고 완성된다. 바로 보살됨의 내용이 이 한 절을 벗어남이 없다. 역사적으로 대승의 규정은 이 한 절을 떠나서 따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승의 宗旨인 것이다.

- 맞다. 이 정종분뿐만이 아니라 금강경 전체가 이 절의 보살에 대한 의미규정을 풀어 실증하여 진리인식이라는 한 깨달음을 기도하는 것이다. 구태여 무아론뿐만이 아니라 삼법인 등, 팔만대장경이 온통 이 일일 뿐인 것이다. 지금 도올이 다시없는 무아론을 세워 종교를 말하는 이것 역시 보살로써의 도올의 지혜작동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도올로써의 사람들만이 보살이 아니다. 더구나 무아라는 개념의 뜻을 실천하는 자만이 보살인 것도 아니다. 도올이 이미 있는 삼법인에 대한 사유로부터 無我一法印이라는 이 사유의 말을 탄생시킨 것은 도올만이 보살로써 작동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삼법인도 무아일법인도, 이들이 있게 된 일체 모든 인연의 이것들도 보살로써, 이 보살에 의한 보살로써의 작동으로 중중무진 작동하는 총체적 작동의 보살인 것이다. 이 도올과 삼법인과 무아일법인이란다고 이 뿐인가?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은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써, 이 삼세는 총체적 인연·인과로 작동하는 중도·여래·열반의 보리살타로써, 이 성품의 삶은 오직, 이 성품의 삶인 선정으로 지혜작동하는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인 것이다. 이를 분명히 밝힌 본 절은 그러므로 이를 보다 분명하게 표현하여 해석해야 한다.

‘어쩐 까닭이냐면 지혜작동의 보살이 이 四相으로 있으면, 이 四相으로 즉한 (실재의 실체랄) 것이므로 지혜작동의 보살이 아닌 것이다.’

이는 분명코 보살로써의 석가여래의 보살짓을 말한 것이 아니라 석가여래가 보살이라는 말의 개념, 즉 보살됨을 설명하는 말이다.

도올이 본문 若菩薩의 若자를 ‘만약’이라고만 푸는 건,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가 보리살타로써의 진리의 진실임을 밝혀 증명하는, 구태여 불교가 있는 까닭에 많이 어긋나는 해석이다. 오직 진리의 진실일 뿐임으로 가정을 하는 이런 말은 매우 위험한, 구태여 선 불교를 없이 할 수 있기 십상인 말이다. 이 若자는, ‘지혜’를 표상한 문자의 말로 보아야 한다. 보살이, 보살이란 언어문자가 실재의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써의 노상 작동임을 애써 드러내는 언어문자이다. 진리의 진실이란 대도, 연기의 실상이란 대도, 보살이란 대도, 지혜작동이란 대도 이는 오직, 지혜로써의 작동인 것이다. -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이 四相·····에 대해서는 ····· 역대의 해석이 구구 분분,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음으로, ····· 내가 직관적으로 생각하는 바를 설파하겠다.

한마디로 이 四相의 부정은 곧 불타의 一法印이라 할 수 있는 “諸法無我”論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 바로 이런 인식의 말이 위험한 말이다. 설령 이 절이 ‘“諸法無我”論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절이란 대도 (사실 이것이 아니라 無我란다면 소유일체중생이 무아로써의 보살임을 말한 것이지만) 무아란 말은 ‘아랄 것이 없다’는 뜻으로써, 이 四相의 我랄지라도 사상으로써의 아랄 실재의 실체랄 것은 없다는 것이지, 이를 대책없이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닌 것이다. 사상이란다면 사상이란 이것이 보리살타로써 연기의 실상임을 말한 것이지, 이 따위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전면 부정이 아닌 것이다.

나는 분명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으로써의 독립적 개체인 소승으로써의 삶인 동시에 이 四相으로써의 통합적 전체인 대승으로 작동하는 지혜의 보리살타인 것이다.

四相은 소유일체로써의 무량무수무변의 중생을 네 가지로 표상한 것이다. 당시의 인도사회에 이 네 가지 상이 실재의 실체라는 앎에 사로잡혀 있어 이를 부정한 것이란다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석가여래가 당시의 인간의 윤리의식이 자기의 생각과 달라 이를 부정하고 다른 윤리적 지침을 말한 거라면 이는 아니다. 인간의 윤리란다면 오직, 이것이 연기의 실상임을 밝힌 것이다. -

도올은 말한다.

보살에게는 어떠한 경우에도 “我”라고 하는 실체가 있어서는 아니된다. 我가 있으면 그것은 곧 보살이 아니다. 즉 보살됨의 규정은 곧 無我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다. 無我의 실천이 없이는 반야의 지혜가 불가능해 지는 것이다.

- ‘보살됨의 규정은 곧 無我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긴 하지만, 이 말의 의미가 사람이 보살이 된 건 무아를 실천해야만 되는 것으로 이해한 말이라면 이건 아니다. 보살은 사람이 무아를 실천 해야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든 무엇이든 무엇을 무엇이게 하는 이 作動態를 표상한 말이다. 예를 들면 보살은 1과 1이 2가 되게 하는 작동의 +며 =로써의 態를 표상한 말이다. 이 1이며 2로써의 我랄 것들이 이 我로써 작동케 하는 작동태이므로 보살은 我랄 것이 없는 실천작동 그 자체이므로 無我인 것이다. 이런단다고 보살을 +나 - 따위의 어떤 힘으로 실재하는 실체로 규정하여 안단다면 이건 아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써의 我는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천상천하가 총체적 인연·인과로 작동한 중도·여래·열반의 보리살타로써 연기의 실상인 我이므로 실재의 실체로써의 아랄 것이 없는 我라고 이미 말한 바 있다. 이런 나는 이미 마땅히 無我의 보리살타로써 이 나의 삶으로 지혜작동하고 있는 연기의 실상인 것이다. 無我는 보리살타를 한역한 말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보살이 무아를 실천해야만 보살인 거라고 우기는 건, 인간의 윤리성에만 사로잡혀 구태여 불교가, 이 금강경이 있는 까닭엔 아득한 우김의 보살인 것이다. -

도올은 말한다.

모든 개념은 역사적 상황을 갖는 것이며 이 (四相의)네 개념은 기실 알고 보면 새로운 보살운동이 기존의 그리고 當代의 모든 邪念들을 타파하기 위한 것으로서 설정된 대자적 개념이라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 석가여래의 사유내용이나 불교에 대한 도올의 시각이 용어나 개념에 대한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음이 이런 이해의 記述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석가여래가 깨달은 사유의 내용이나 구태여 불교가 선 까닭은 ‘기존의 그리고 當代의 모든 邪念들을 타파하기위한 것’이 아니다. 설령 대승불교란 대도, 보살의 중요성을 드높이는 보살운동이란 것이 명시적으로 불전으로 유전되고 있단 대도, 이는 ‘새로운 불교운동’이랄 것은 없는 것이며, 더구나 이 四相의 개념이 ‘기존의 그리고 當代의 모든 邪念들을 타파’하기 위해 보살의 ‘대자적 개념’으로 설정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은 석가여래의 사유내용이나 불교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니다. 석가여래의 사유내용이나 구태여 불교가 선 까닭은 邪念, 正念 따위를 가리지 않는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이 총체적으로 작동하는 지혜의 보살로써 연기의 실상인 진리의 진실이라고 깨닫는 이 깨달음이다. 그러나 사실 이 잘못은 아주 미세하여 바르게 보지 못하면 놓치기 십상이다. 도올의 이 기술이 얼마나 그럴듯한 내용인가. 허점을 바르게 보기가 매우 어렵다. -

도올은 四相을 이렇게 말한다.

1) 우선 아뜨만(atman)은 ····· 브라마니즘이 형이상학적 원리로 상정한 ····· 실천적 원리며, 그것은 윤회의 주체인 것이다. 여기 아뜨만의 부정은 불교의 반브라마니즘적 성격을 명료히 드러내는 것이다.

2) 다음, 사뜨바(sattva)는 ····· 곧 有情이다. 즉 “有情+깨달음의 추구”가 되며는 “보살”이 된다. 즉 보살과 중생의 이원적 구분의 相이 있어서도 아니된다는 것이다. 모든 보살은 有情(중생)을 전제로 하고 있으나, 보살이 곧 중생이요, 중생이 곧 보살인 것이다. ·····. 진정으로 우리가 一乘의 깨달음을 추구한다면 有情과 非情의 區分조차 해소되어야 하는 것이다.

3) 지바 4) 뿌드갈라 생략.

- 도올 같이 날카로운 분석력을 가지고 있는 이도 까딱하면 놓치는 것이다. 현재 인도사회의 주류 종교인 힌두교나 중국의 신유학 등이 불교의 영향을 받은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서 불교의 그림자가 잘 드러나지 않는 까닭은 석가여래의 깨달음이 브라만이나 유학 등, 이 깨달음과 충돌하는 어떤 것도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모든 것들이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임을 밝힌 이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 대한민국에서 횡행하고 있는 불교적 행태가 온전한 불교인가? 온전하지 않단 대도 오직 진리의 진실이므로 불교인 것이다. 구태여 불교가, 금강경이 있는 까닭에 대한 도올의 근원적 오해의 진술은 그래서 진리의 진실인 것이다.

도올은 석가여래의 사유체계에 대하여 근본적인 오해가 있는 것이다. 그의 인식체계를 형성하는 디엔에이가 그릇된 기독교적인 것이거나, 그의 땅 한국적 토착신앙에 사로잡힌 인자인 때문인가? 그렇더라도 도올은 그런 디앤에이로 작동하는 보리살타로써 진리의 진실이다.

다음, 사뜨바(sattva)는 보리살타의 살타인 사뜨바다. 이 사뜨바를 衆生, 有情이란다고? 누누이 말했지만 보리사뜨바를 우리말로 풀면, 다함이랄 것이 없이 겹겹으로 겹치고 겹치는 쌓임(중중무진)의 시·공간인 과거 현재 미래라는 삼세로써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의 세계인 이 모든 성품의 삶은 보리의 衆으로써 ‘있음·有’이며, 이 보리의 衆인 ‘있음·有’는 총체적 인연·인과로 작동하는 삶으로써 사뜨바의 生인 情이다. 이 보리는 사뜨바에 의한 결과이며, 이 사뜨바는 보리를 인연으로 하는 작동의 중중무진이, 이 반야바라밀·지혜작동의 중중무진이 보리사뜨바인 것이다. 보리·衆은 보리사뜨바·衆生으로써의 보리·衆이며, 사뜨바·生 역시 보리사뜨바·衆生으로써의 사뜨바·生이다. 이는 연기·사뜨바·生은 실상·보리·衆이며 실상·보리·衆은 연기·사뜨바·生인 것이다. 이런 단순한 말로써의 단일한 논리의 작동력이 중중무진인 것을 표상한 말이 보리사뜨바인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은 보리사뜨바로써 연기의 실상인 진리의 진실인 것이다.

相은 상대적 인식임을 표상한 말이다. 이 我 人 衆生 壽者에 相을 붙인 까닭은 이 四相으로써의 모든 존재와 현상인 이 성품의 삶이 실재의 실체랄 것이 없는 연기의 실상으로써 상대적 인식의 相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실재의 실체로 알고 있는 이 四相은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의 선정지혜로써 연기의 실상임을 말한 것이다.

이 사뜨바를 말하지 않고 뭔 중생이 깨달음을 추구하면 보살이라느니, 그래서 중생이 보살이라느니 하는 진술은 보살을 인간의 윤리적 행위로만 보는 심각한 오해다. 더구나 有情, 非情의 구분이란다면 이런 구분의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이 일승의 보리살타에 의한 지혜작동으로써의 깨달음인 진리의 진실임을 바르게 보아야 하는 것이지, 뭔 이런 구분을 해소해야 한다고, 사람 대그빡 아작 내란 소릴 하는가? 헐!

도올은 말한다.

사실 이 我·人·衆生·壽者는 無我論의 네 개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 나는 이 四相을 존재의 외연의 확대로 해석한다. ·····. 실체관의 외연의 확대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

우리말 어원을 한어와의 관련 속에서 고찰하는 국어학자들에 의하면 우리말의 짐승(즘생)은 곧 “衆生”의 변형태라고 한다. 앞서 말했듯이 衆生(sattva)은 有情을 통칭하며 유정의 개념에서는 식물의 외연이 빠진다는 나의 발언을 생각하면 쉽게 수긍이 갈 것이다. ·····. 즉 “衆生相”이란 즘생(짐승)같은 삶을 영위하는 뭇 인간들이다. ·····.

相은 玄奘의 번역대로 곧 “想”이다. 그것은 실재가 아니요 곧 생각인 것이다. 我가 있고 人이 있고 衆生이 있고 壽者가 있다는 생각(想) 그 모습(相)이 있는 한 우리는 영원히 보살승에 오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상기하자! 부처님은 문둥이! 십자가는 무아!

- 맞다. 이 四相을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라는 이것의 ‘외연의 확대로 해석’한 대도, 확대된 이것으로써의 四相이 실재의 실체라는 앎에 사로잡혀 머물지만 않는다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이 크고 작고 멀고 가까운 따위, 이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의 선정으로 작동하는 지혜의 보리살타로써 연기의 실상임을 아는 구태여 불교가, 이 금강경이 있는 까닭을 밝혀 증명한 사유의 말이므로 진리인식의 한 생각이 격발하기에 맞춤한 진리의 진실이므로 맞다 하겠다.

구태여 불교가, 이 금강경이 있는 까닭은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을 원근대소 따위의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으로 해석하라 마라라고 하는 지침이나 가르침이 아니다. 도올처럼 이 四相이 이렇게 ‘실체관의 외연의 확대로 해석될 여지’가 있단다면 이 사유의 이 말이 연기의 실상이라고 아는 이 앎을 가르키는 손가락질인 것이다.

그러나 이 얘긴 좀 다른 것 같다. 어떤 국어학자가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짐승(즘생은 짐승에서 파생한 사투리다. 그렇다고 노상 사투리가 표준어에서 파생하는 것으로만 보는 것도 옳지는 않다. 그 역으로써도 가능한 것이다.)이란 말이 ‘중생’이란 말의 변형이라고 보는 건 옳지 않지 싶다. 더구나 도올이 자랑스럽게 말하듯 중생이란 말의 개념에서 ‘식물군의 외연’이 빠진다고 하는 건, 석가여래의 인식체계 속엔 인간의 소박한 윤리적 문제의식으로만 가득하다는 진즉의 도올의 말에 비춰보면, 이렇게 중생의 짐승이며 ‘수자의 시간’을 운위하는 건 석가여래의 인식체계의 외연을 엄청나게 확대한 것으로 의외다. 대체 동식물을 제외한 다른 것들은 눈에 안 보인다는 것인가? 설령 동식물뿐만 아니라 단순 생각의 없단 대도, 아니란 대도, 오직 진리의 진실임을 밝혀 말한 증명으로 구태여 불교가, 이 금강경이 있는 까닭인데, 이렇게 꼭 찝어 단적으로 여지없이 말하는 건, 소박한 싯달타라는 소박한 아름다운 말 속에 거대한 싯달타의 인식내용을 묻어버려 진리인식의 한 생각이 격발하기엔 너무 먼 말을 하는 당신이다. 바르게 보시라. 내가 아는 1+1=2의 이 작은 이치가, 뉴튼의 작은 머릿속 상상이 지구를 넘어 태양계를 넘어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을 우주선 보이저를 타고 여행하게 하는 이 엄청난 연기의 실상임을 바르게 보시라. 각설하고, ‘짐승’이란 말은 ‘중생’이란 말에서 변형된 말이 아니라 소승·대승이란 말을 변형시킨 말이다. 소승·대승의 지혜도 없어 그런 작동도 못하는, 짐이나 짊어져야하는 ‘짐승’의 축에나 든다는 의미의 말일 것이 틀림없지 싶다.

구태여 이 금강경에서 ‘존재의 외연의 확대’로써의 四相을 운위하는 건 도올이 사유하여 말하는 대로, 이 四相이 있다는 생각의 모습(相)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영원히 보살승에 오를 수 없게 되는 것’임을 말한 것이 아니다. 바르게 사유하시라. 우리 사람성품은 ‘我가 있고 人이 있고 衆生이 있고 壽者가 있다는’ 이 생각(想)의 모습(相)인 이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의 선정에 사로잡혀 사는 삶의 이 우리 사람성품은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써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총체적 인연·인과로 영원히 작동하는 중도·여래·열반의 영원한 보리살타로써, 오직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우리의 이 삶으로 영원히 작동하는 지혜의 반야바라밀인 연기의 실상이므로 ‘영원에 승선한 보살’로써 진리의 진실이다.

탈 것의 보살은 저기 어디 있는 실재의 실체가 아니라, 바로 내가 滅度의 부처인 문둥이로써의 보살인 것이며, 滅道의 無我를 상징하는 십자가로써의 보살이라는 배에 탄 나이다.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인 我는 보살이다. 대박!

이 금강경뿐만 아니라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은 오직, 이를 밝혀 증명하는 기도로써의 진리의 진실이다. -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
공지 게시판 글쓰기에 관한 안내입니다 [3] admin 2011-07-08 519255
2361 좋은 글 행복한 사진 우리의 사랑은 변덕, 자가당착 인가-27 newimagefile joochang 2017-09-26 29
2360 일반 도올의 금강경 오해 28 seolbongchang 2017-09-23 77
2359 일반 “봉은사 전통가람의 발전방안” 학술대회 개최 garamyssi 2017-09-21 85
2358 좋은 글 행복한 사진 지식은 인간의 최고의 가치 인가-26 imagefile joochang 2017-09-20 131
2357 일반 마음의 작동원리(부제 : 깨달음의 원리) file kunginews 2017-09-18 175
2356 일반 평화를 향해... imagefile yahori 2017-09-18 202
2355 일반 도올의 금강경 오해 27 seolbongchang 2017-09-17 110
2354 일반 가을은... imagefile jjang84 2017-09-13 241
2353 좋은 글 행복한 사진 패거리 정서 차별, 부패, 비경쟁, 비이성 조장하나-25 joochang 2017-09-13 169
2352 일반 도올의 금강경 오해 26 seolbongchang 2017-09-08 307
2351 일반 이대로 지옥 imagefile yahori 2017-09-06 483
2350 일반 도올의 금강경 오해 25 seolbongchang 2017-09-03 306
2349 좋은 글 행복한 사진 지혜는 지식+경험+깨달음이다-24 imagefile joochang 2017-09-02 295
2348 일반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 imagefile yahori 2017-08-28 380
2347 좋은 글 행복한 사진 권력은 오만 부패 아부를 낳는다-23 joochang 2017-08-26 354
2346 일반 도올의 금강경 오해 24 seolbongchang 2017-08-26 363
2345 일반 겸허한 반딧불빛, "용서하세요" imagefile jjang84 2017-08-24 644
2344 일반 가축 학대형 사육장에서... imagefile yahori 2017-08-22 484
» 일반 도올의 금강경 오해 23 seolbongchang 2017-08-20 373
2342 좋은 글 행복한 사진 만물의 다양성 우주의 질서-22 joochang 2017-08-16 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