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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type="text">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title>
      <updated>2013-05-19T09:15:45+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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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문제를 비켜가지않는 붓다의 힐링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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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3-05-17T09:54:13+09:00</published>
      <updated>2013-05-19T08:22:10+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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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법인 스님</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lt;span style=&quot;color: rgb(114, 25, 71);&quot;&gt;&lt;br /&gt;&lt;/span&gt;&lt;/b&gt;&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lt;span style=&quot;color: rgb(114, 25, 71);&quot;&gt;지금은 직설이 필요한 시대&lt;/span&gt;&lt;/b&gt;&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지금 대한민국은 온통 힐링 바람이다. 서점의 가장 눈에 띄는 매대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역시 힐링을 주제로 한 책이다. 뿐만 아니라 온갖 법회와 강좌, 수련회도 힐링을 달아야 관심을 받는다. 얼마 전 한 때를 휩쓸었던 웰빙 바람을 이어 힐링은 이제 돈이 되는 마음산업의 영역까지 개척하고 있다. 이제 머지않아 불교 사찰의 전각에는 ‘힐링 붓다’가 모셔질지도 모르겠다. 약사여래불이 출현했듯이 말이다.&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럼 웰빙과 힐링의 출현 배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가는 현실이 그리 행복하지 않다는 것, 끊임없이 아프고 힘들고 괴롭다는 것, 그래서 치유 받고 진짜 사는 것같이 살아보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긴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힐링과 웰빙을 희망하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 힐링과 웰빙의 염원에 부응한 것이 석가모니 붓다의 사성제의 교리가 아니겠는가?&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사람들이 소리 지르고 있다. 입시에 시달리는 학생들, 입학과 동시에 4년 동안 취업준비생이 된 대학생, 취업과 연애와 출산을 포기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힘들다고 말한다. 고비용의 육아와 교육에 등이 휘는 중년, 은퇴와 고령의 세대도 힘들다고 외친다. 산업자본주의 시대에서 속도와 성장과 배타와 경쟁으로 자신의 삶을 내몰아가다가, 신자유주의의 링 위에 갇히고 미아가 된 모든 세대가 ‘힘들다’고 울부짖고 있다.&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래서 힘들고 상처 받은 사람들이 무엇을 찾는다. 어떤 말을 듣고 싶고 누군가의 손길과 눈길을 받고 싶어 한다. 쉬고 싶고 위로 받고 힘을 얻고자 한다. 그래서 산사를 찾고 멘토의 강의에 열광하고 수행프로그램에 참가한다.&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398/178/%EB%B6%93%EB%8B%A4%EC%9D%B4%EB%B9%84%EC%97%90%EC%8A%A41.jpg&quot; width=&quot;533&quot; height=&quot;303&quot; alt=&quot;붓다이비에스1.jpg&quot; title=&quot;붓다이비에스1.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br /&gt;&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힐링의 주요 처방으로 명상과 상담이 호응을 받고 있다. 이때 붓다와 불교의 교리, 수행법은 힐링을 위한 최적의 길이 된다. 왜냐하면 팔만대장경 전체가 바로 ‘고통의 치유학’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응병여약(應病與藥)이라고 했던가? 병이 나면 정확한 진단과 그에 따른 처방이 필요하다. 그런 관점에서 붓다는 철저한 맞춤형 힐링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붓다는 개인적으로 허약하고 사회적으로 소외 받는 사람을 품어 주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셨다. 오늘날 많은 멘토들이 그러하듯이 힘들고 아픈 소리에 정성껏 귀기울여주고 어깨를 토닥여 주셨다. 불가촉천민 중에서도 제일 낮은 취급을 받는 똥 치는 신분의 니디에게는 몸에 묻은 똥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마음의 탐욕이 더러운 것이라며 주눅 들지 말고 살아가도록 격려해주셨다. 풋티갓사팃사라는 이름의 제자는 젊고 싱싱하던 피부에 병이 들어 피고름이 흘러내리고 몸에는 악취가 났다. 그러자 대중의 관심과 손길이 멀어졌다. 붓다께서는 아무 말 없이 찾아오셔서 깨끗한 물로 그를 목욕시켜 주고 약도 발라주고 그가 입던 옷을 빨아 주셨다. 그리고 그에게 몸과 마음의 무상함을 일러 주고 집착과 불안을 해소할 수 있게 해주셨다. 또 눈이 멀어 바늘을 잡을 수 없는 아니룻다의 가사를 꿰매 주며 마음의 동반자가 되어 주셨다. &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이렇게 따뜻하고 자상한 붓다는 동시에 엄정하고 준엄한 멘토의 모습으로 대중에게 다가온다. 물질과 자본에 중독되어 향락에 빠진 젊은이들에게는 직설의 멘토였다. 인도 바라나시 부호의 아들 야사는 먹고 마시고 춤추며 노는 쾌락에 빠진 젊은이였다. 그는 어느 날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는 아내와 미인과 친구들의 추한 몰골에 환멸을 느껴 괴로워한다. 붓다는 야사에게 인생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고 그가 새로운 길을 가게 한다. 또 바라나시 교외에서 쌍쌍파티 중에 귀금속을 훔쳐 달아난 여인을 찾는 젊은이들에게도 붓다는 준엄한 멘토로서 그들을 힐링한다. “그대들이여, 달아난 여인을 찾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진실한 자신을 찾는 것이 중요한가?”라고.&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 &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또한 당대 최고의 부호이며 붓다의 든든한 후원자인 수닷타 장자의 며느리 옥야를 향한 붓다의 대중법문은 직설화법의 절정이다. 옥야는 왕족이며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 요즘 시대에  견주면 외모와 친정의 권세를 믿고 교만하고 불성실하였던 모양이다. 그런  옥야를 향해 붓다는 가감 없이 말한다. “외모와 화려한 옷과 장신구로 치장하여도 그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다. 마음과 행실이 정직해야 한다. 너는 성질이 사납고 시부모에게 공손하지 못하다. 내 너에게 참다운 아내의 도리를 말해 주리라” 그리고 붓다는 좋고 나쁜 일곱 종류의 아내를 말해준다. 지금으로 말하면 10대 대기업 총수의 며느리에게 날린 사자후가 아닌가? 붓다는 이렇게 사람의 생각과 행실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주는 힐링의 고수였다. &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리고 붓다는 비유와 직설로서 계급 차별에 고통 받는 사람들과 고통을 주는 사람들에게 직설하였다. “상류계급도 살인과 도둑질을 하면 형벌을 받게 되오. 천한 행위를 하면 그는 천한 사람이 되고 고결한 행위를 하면 그는 고귀한 사람이 되오. 나는 출생을 묻지 않는다오. 다만 행위를 물을 뿐이오.” 이야말로 계급과 양성의 불평등으로 고통 받는 인류를 향한 개인과 사회를 아우르는 힐링이 아닌가?      &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398/178/%EB%B6%93%EB%8B%A4%EC%9D%B4%EB%B9%84%EC%97%90%EC%8A%A43.jpg&quot; width=&quot;533&quot; height=&quot;317&quot; alt=&quot;붓다이비에스3.jpg&quot; title=&quot;붓다이비에스3.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br /&gt;&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 font-size: 12px; color: rgb(120, 92, 37);&quot;&gt;*출처 : EBS &apos;깨달음을 얻은 자, 붓다&apos;&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분쟁의 현장에서도 붓다는 사회적인 멘토였다. 가뭄이 들어 물싸움이 심해져 마침내는 폭력의 상황에 이른 현장에 가서 붓다는 물이 중요한 것인가&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사람의 생명이 중요한가를 대중들에게 묻는다. 싸움은 모든 사람에게 공멸을 가져온다고 지적하였다.&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자. 이제 인생의 멘토로서 붓다의 힐링을 한 번 분석하면서 이 시대 진정한 힐링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힐링이 무엇인가? 삶의 치유가 아닌가? 치유는 일시적인 응급처방이 아닌 회복과 건강이 목적이다. 아프고 힘들어 하는 소리를 들어주고, 괜찮다고 위로하고 손잡아 주고, 지금까지도 너는 충분히 잘했으니 앞으로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해 주는 것이 힐링이다. ‘나는 지금 위로가 필요해요’라는 사람에게는.&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러나 붓다의 사성제는 힐링에 대해 정직한 ‘진단’과 정확한 ‘처방’을 요구한다. 즉 정확하고 정밀하게 삶을 힘들고 괴롭게 하는 원인을 찾아내어 이를 해결하라고 한다. 괴롭고 즐거운 삶의 현실은 바로 행위와 그 결과이기 때문에. 상처는 일시적으로 은폐하거나 봉합하는 것으로는 치유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악화될 뿐이다.&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붓다의 힐링은 적절한 비유와 자상한 설명을 곁들이지만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직설’이었다. 외아들을 잃고 구원을 바라는 키사 코타미에게는 사람이 한 번도 죽지 않은 집에서 곡식을 얻어 오면 아들을 살려 주겠노라는 방편으로, 목숨은 무상하여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이치를 깨닫게 했다. 직설적 처방이다. 마을 사람에게 따돌림을 받아 괴로워하는 촌장에게는 그대가 포악하고 심술궂기 때문이라며 그런 행위를 그만 두라고 했다. 위에서 열거한 멘토 붓다의 화법을 보라. 정확하게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말하고 그에 대한 원인을 소멸하라고 한다. 지혜와 자비는 바로 직설의 화법으로 말하는 것이다.&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사람이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원인은 대략 세 가지다. 그것은 무지와 게으름, 그리고 비겁이다. 또 사람을 힘들게 하는 사회구조가 있다. 그 사회는 속도와 성장을 목표로 개인을 도구화하고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국가권력과 기업과 학교 등이다. 지금 진정한 힐링을 위해서는 개인과 사회에 돌직구를 날리는 직설이 곧 유일한 처방이다.&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398/178/%EB%B6%93%EB%8B%A4%EC%9D%B4%EB%B9%84%EC%97%90%EC%8A%A42.jpg&quot; width=&quot;533&quot; height=&quot;303&quot; alt=&quot;붓다이비에스2.jpg&quot; title=&quot;붓다이비에스2.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br /&gt;&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어설픈 위로는 개인을 나약하게 만들고 탐욕과 독점을 교묘하게 감추고 있는 사회구조에 면죄부를 준다. 그러므로 아프다고, 괴롭다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이여, 위로 받기 전에 냉엄하게 자가 진단하라. 내 삶은 방향을 제대로 잡았는가, 나는 지금 남의 삶을 눈치 보며 흉내 내고 있지는 않는가. 진정한 힐링은 나를 내 삶의 주체로 세우고 독창적으로 살아갈 때 가능하며, 이를 통해 자유와 행복은 성취되는 것이다. 생전에 스티브 잡스가 암 진단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직관이 내는 소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을 이미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부처님 오신날! &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당신은 자기존재를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존엄으로 빛나게 하고 싶습니까?&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러면 당신&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은 누구에게 위로 받기보다 자신과 세상을 잘 분별하고, 단호하게 거부하고, 꿋꿋하게 저항하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만드십시오.&amp;nbsp;&lt;/span&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br /&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amp;nbsp;&amp;nbsp;&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p&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p&gt;&lt;/div&gt;</content>
                  <category term="부처님오신날"/>
            <category term="법인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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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법륜 스님의 ‘행복하게 나이 드는 법’</title>
      <id>http://well.hani.co.kr/177519</id>
      <published>2013-05-16T10:49:30+09:00</published>
      <updated>2013-05-17T10:43:50+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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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조현</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amp;nbsp;&lt;/p&gt;
&lt;p align=&quot;center&quot;&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519/177/%EB%B2%95%EB%A5%9C%20%EC%8A%A4%EB%8B%98%EA%B3%BC%20%EC%A1%B0%ED%98%84-.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358&quot; alt=&quot;법륜 스님과 조현-.jpg&quot; title=&quot;법륜 스님과 조현-.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p&gt;
&lt;p align=&quot;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x&quot;&gt;방송 진행자인 조현 기자와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x&quot;&gt;&apos;행복하게 나이 드는 법&apos;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법륜 스님.&amp;nbsp; 사진 &amp;lt;평화재단&amp;gt; 제공&lt;/span&gt;&lt;/p&gt;
&lt;p align=&quot;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x&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 rgb(0, 0, 255);&quot;&gt;&amp;lt;한겨레&amp;gt; 창간 25돌 기념 대담&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떨어지는 낙엽도 예쁘듯&lt;br /&gt;늙는 것 자연스럽게 수용&lt;br /&gt;죽음에 대한 두려움 깨야&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남한테 신세졌으면 좀 갚고&lt;br /&gt;움켜쥐고 집착한 것 있으면&lt;br /&gt;훌훌 털고 베풀면서 살아야&lt;/strong&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는 출신과 능력, 외모 무엇하나 남부럴울게 없었다. 모두의 부러움을 산 ‘엄친아’였다. 그런 그가 당시로선 중년을 앞둔 29세에 모든 스펙을 버리고 집을 떠났다. 왜였을까. 어느 날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실상을 목도한 그는 스펙도 부도 권력도, 신조차도 생노병사의 고통을 해결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위기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이를 극복할 길을 찾아 떠났다. &lt;/p&gt;
&lt;p&gt;&lt;br /&gt;　그 동안 식민과 전쟁, 가난, 독재의 와중에서 생존을 위해 달리기에만 급급했던 한국인들에게도 싯다르타의 위기가 더욱 생생하게 다가서고 있다. 최대 축복으로 찬양되던 장수 시대로 진입했지만, 오히려 불안은 커져간다. 금융회사들은 불안마케팅으로 노후를 맞는 대중들의 불안심리를 더욱 자극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자포자기와 자살로 이어지기도 한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국민 우울시대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피할 수 없어 우울한 현대인들에게 내세가 아닌 현세에서 보다 평안하고 행복해질 길이 있을까.&lt;br /&gt;&lt;/p&gt;
&lt;p&gt;　&amp;lt;한겨레&amp;gt; 창간 25돌과 ‘부처님 오신날’(17일)을 맞아 한겨레티브이가 정토회 지도법사이자 평화재단 이사장인 법륜(60) 스님을 초청해 그 길을 물었다.‘행복하게 나이 드는 법’이다. 지난 7일 서울 서초동 평화재단 강당에서 진행된 첫 대담은 주로 ‘죽음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에 집중됐다.&lt;br /&gt;　 &lt;/p&gt;
&lt;p&gt;&amp;nbsp; &lt;/p&gt;
&lt;div style=&quot;width: 480px; height: 360px;&quot;&gt;&lt;span style=&quot;position:relative; top:164px;left:209&quot;&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modules/editor/components/multimedia_link/tpl/multimedia_link_component.gif&quot; /&gt;&lt;br /&gt;Attached Youtube Video&lt;/span&gt;&lt;/div&gt;
&lt;p&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p&gt;
&lt;div style=&quot;width: 480px; height: 360px;&quot;&gt;&lt;span style=&quot;position:relative; top:164px;left:209&quot;&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modules/editor/components/multimedia_link/tpl/multimedia_link_component.gif&quot; /&gt;&lt;br /&gt;Attached Youtube Video&lt;/span&gt;&lt;/div&gt;
&lt;p&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불교는 ‘생사일여’(삶과 죽음이 하나)라며 죽음을 최고의 평화인 열반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그는 불교에 입문한 뒤 10여년이 지난 1970년대말 유신말기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받으며 생명의 위협에 맞닥뜨렸을 때 “두렵고 왜소해지고 비굴해지는 자신을 봤다”고 고백했다.&lt;/p&gt;
&lt;p&gt;&lt;br /&gt;&amp;nbsp;&lt;/p&gt;
&lt;p&gt;　그는 중고등학교에 재학할 때까지 100미터 달리기만 해도 온 몸에 파랗게 반점이 생길만큼 허약했다고 한다. 늘 죽음을 머리에 이고 살았던 셈이다. &lt;/p&gt;
&lt;p&gt;&lt;br /&gt;&amp;nbsp;&lt;/p&gt;
&lt;p&gt;&amp;nbsp;그는 “생명이 있는 것이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했다. 생명도 하나의 법칙이 있어 지속하려는데, 이를 중단시키려들면 저항이 따른다는 것이다.&lt;br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　“산토끼 같은 들짐승도 죽이려하면 도망가고 발바둥친다. 그러나 수명이 다해도 그런가. 자연스럽게 생명이 다할 때는 그것을 받아들인다.”&lt;br /&gt;&lt;/p&gt;
&lt;p&gt;　그의 죽음관은 ‘자연스러움’에 자연스럽게 맞닿는다. 세상이 지속가능하려면 태어남만 있어서는 유지될 수 없다고 한다. 태어남은 있는데 죽음이 없다면 이치에도 맞지않는다는 것이다.&lt;br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　인생의 불운을 행운으로 돌리는 것은 수행이 주는 축복이다. 그는 “남들은 70~80년을 살겠지만 내 수명은 40 전후쯤이라고 생각했기에 이 점이 오히려 열심히 사는 계기가 됐고, 그 이후 삶은 덤으로 여기게 됐다”고 했다. &lt;br /&gt;&lt;/p&gt;
&lt;p&gt;&amp;nbsp;그에게 “지금 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게 된다면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느냐”고 물었다. &lt;br /&gt;&amp;nbsp;“만약 당뇨병 환자가 당이 떨어져 쓰려졌다면 사탕을 먹이든지 링게르를 꽂아 회복시켜야 한다.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가 부러지거나 기절했더라도 병원에 가서 치료해야 한다. 그러나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돼 뇌사에 이르렀다면 자연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좋다. 그것은 나든 남이든 마찬가지다.” &lt;br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그는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는 것도 생명 존중 사상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그 명이 다해서 죽어가는 것을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것도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했다.&lt;br /&gt;&lt;/p&gt;
&lt;p&gt;　세상의 관심은 천국이나 극락을 보았다느니 내세는 없다느니 하는 관심이 지대하다. 그러나 그는 “문제의 핵심은 ‘죽느냐 안죽느냐’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임을 분명히 한다. 자신이 영원히 사라져버릴까봐 두려워하는 인간들이 어떻게 그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단 말인가.&lt;br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　“만약 얼음으로 만든 구슬을 가지고 놀던 아이가 밖에 나갔다 돌아와보니 얼음구슬이 물이 돼 있다면 아이는 구슬이 없어졌다거나 물이 생겼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없어졌다거나 생겨났다고 생멸을 인식하지만 존재 자체는 없어진 것도 생긴 것도 아니다. 변화된 것일 뿐이다.”&lt;br /&gt;&lt;/p&gt;
&lt;p&gt;　그가 말하는 것은 ‘존재의 실상’에 대한 깨달음이다. 존재란 본래 생겨남과 사라짐이 없이 변할 뿐이라는 것이다.　　&lt;/p&gt;
&lt;p&gt;&lt;br /&gt;　“두려움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두려움이 사라지고 나면 꿈과 같은 것이다. 꿈 속에 살 때는 좋은 꿈이 있고, 나쁜 꿈이 있지만 인식의 오류에서 벗어나면 두려움은 꿈일 뿐이다.”&lt;br /&gt;&lt;/p&gt;
&lt;p&gt;　그는 “봄에 피는 새잎도 예쁘지만 여름에 무성한 잎도 예쁘고, 가을 단풍도 예쁘고, 떨어지는 낙엽도 예쁘다.”고 했다. 그는“늙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교육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강조한다.&lt;br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　“나이가 들면 주름살도 생기고 눈도 좀 침침하고 걸음걸이도 불편해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도 90살이 되어도 눈이 초롱초롱하고 피부도 탱클탱글해져야한다고 생각하니 늙어가는 것이 고통스러워지는 것이다.”&lt;br /&gt;&lt;/p&gt;
&lt;p&gt;&amp;nbsp;사람들의 마음은 과거에 대한 상처나 미래에 대한 불안에 머물며 현재의 자신을 거부한다. 하지만 그는 “병이나 육체적 통증은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으니 아파하더라도 내게 주어진 삶의 현실은 그 어떤 것이든 좀 더 가볍게 기꺼이 받아들이는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삶의 자세를 배워나가야만 고통을 줄여갈 수 있다는 것이다.&lt;br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　2시간의 대담이 끝날 무렵 방청객의 60세 주부가 질문을 했다.&amp;nbsp; 작년까지 비정규직 기간제 교사를 했다는 그는 “임대주택에 살며 아이 둘을 기르느라 저축도 못해 2016년부터 20만원의 연금을 받는 것이 전부여서 막막하기만 하다”고 했다.&lt;/p&gt;
&lt;p&gt;&lt;br /&gt;&amp;nbsp;법륜 스님은“몸은 누일 방이 있고, 밥은 안 굶고 살 수 있으니 다행이고, 나이 들면 많이 먹는게 몸에도 안좋다”는 유머로 가볍게 답변을 시작했다.&lt;br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　“아직은 손자를 봐주든지 절에 가서 청소만 해줘도 한달에 20만~30만원은 벌어서 쓸 수 있는 나이다. 소박하게 생각하면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사는 것만도 다행으로 여길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이제 막 복지가 시작돼 앞으로 복지는 더 나아질 것이기 때문이다.”&lt;br /&gt;&lt;/p&gt;
&lt;p&gt;　부정적인 에너지를 긍정의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것은 그의 주특기다. 그는 “남은 삶을 돈벌이만이 아니라 어떻게 봉사하고 기여할 것인지를 생각하면 지금까지 60년 살아온 것보다 더 보람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노후의 불안’을 오히려 축복으로 뒤바꿔 주었다.&lt;br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　“사람들은 ‘지나고 보니 대학생 때가 좋았네, 30대가 좋았네’ 한다. 그러면 나중에 70, 80이 되어선 60대가 좋았다고 할 것이다. 지금이 그 좋은 60대가 아닌가. 나이 들어서 좋은 게 얼마나 많은가. 학생 때처럼 머리 싸매고 공부 안해도 되지, 취직 안해도 되지, 결혼하려고 이 남자가 나은지 저 남자가 나은지 고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지, 아이를 안나아도 되지않은가. 다 큰 자식과 세상 걱정 할려면 끝이 없다. 이제 훌훌 털고 남은 삶을 덤으로 여기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면서 입었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고 가겠다는 자세로 작은 기여라고 할 수 있으면 좋지않은가.”&lt;/p&gt;
&lt;p&gt;&lt;br /&gt;　법륜 스님이 두시간동안 손잡고 안내한 곳은 천국도 극락도 아니다. 그가 ‘1년 밖에 못산다는 암환자를 병문안하고 돌아가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과거나 미래로 도망치는 마음을 싹둑 베어내는 화두에 다름 아니다.&lt;br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　“하루도 못살 사람이 1년이나 살 사람을 격려하고 위문했다. 결국 환자의 고통은 1년 밖에 못사는 게 아니다. 1년 밖에 못산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1년을 괴롭게 살다가 죽는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핵심은 1년을 사느냐, 100년을 사느냐가 아니다. 열흘을 사는 것도 소중한 인생이고, 100년을 사는 것도 소중한 인생이다. 1년 밖에 못산다고 할수록 그 하루하루를 더 기쁘게 살아야 한다. 남이 10년 사는데 자기는 1년 밖에 못살면 10년 살 사람보다 10배 더 기쁘게 살아아 한다. 이제 곧 죽으니 남 걱정할 것도 없고, 집착할 것도 없이 남한테 신세졌으면 좀 갚고, 남 칭찬 못했으면 칭찬도 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움켜쥐었으면 좀 베풀고, 이렇게 1년을 산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lt;br /&gt;&lt;/p&gt;
&lt;p&gt;&amp;nbsp;조현 종교전문기자 &lt;a href=&quot;mailto:cho@hani.co.kr&quot;&gt;cho@hani.co.kr&lt;/a&gt;　&lt;/p&gt;
&lt;p&gt;&lt;br /&gt;&lt;strong&gt;　‘행복하게 나이드는 법, 법륜 스님에게 묻다’상담 및 방청 신청&lt;/strong&gt; &lt;br /&gt;　△녹화 시간: 2회(6/4, 10-12시), 3회(6/17, 2시-4시 ), 4회( 7/8, 2-4시)&lt;br /&gt;　△보낼 사연: ‘행복하게 나이 드는 법’에 대한 모든 궁금증&lt;br /&gt;　△사연 보낼 곳:sunny@hanibook.co.kr&lt;/p&gt;
&lt;p&gt;&amp;nbsp;&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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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quot;오스발도 교황청대사 총독처럼 굴어&quot;</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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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3-05-16T10:36:31+09:00</published>
      <updated>2013-05-16T10:36:31+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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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조현</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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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amp;nbsp;&lt;/p&gt;
&lt;p align=&quot;center&quot;&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477/177/%EC%98%A4%EC%8A%A4%EB%B0%9C%EB%8F%84%20%EB%8C%80%EC%82%AC-.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62&quot; alt=&quot;오스발도 대사-.jpg&quot; title=&quot;오스발도 대사-.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p&gt;
&lt;p align=&quot;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x&quot;&gt;오스발도 파디야 주한교황청대사&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함세웅 신부, 주한교황청대사 전횡 비판&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lt;/strong&gt;&amp;nbsp;&lt;/p&gt;
&lt;p&gt;　오스발도 파딜랴 주한교황청대사가 주교 임명제청권을 이용해 전횡을 일삼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lt;br /&gt;&lt;/p&gt;
&lt;p&gt;　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 함세웅 신부는 최근 사목자 소식지 &amp;lt;함께하는 사목&amp;gt;에&amp;nbsp; 기고한 글에서 이런 내용의 사제들의 편지를 소개했다.&lt;br /&gt;&lt;/p&gt;
&lt;p&gt;　함 신부는 “지난 2월 서울교구 중견사제들로부터 ‘현 교황대사가 거의 총독 같은 모습으로 한국 가톨릭교회를 쥐락펴락하고&amp;nbsp; 한국 주교들을 하인 대하듯 해 왔다고 한다’는 장문의 편지를 받았다”고 전했다.&lt;/p&gt;
&lt;p&gt;&lt;br /&gt;　사제들은 편지에서 교황대삭 △자신의 모국인 필리핀에 너무 자주 오가고 △한국의 주교들과 실업인, 신자들을 불러 식사 대접하는 것을 기회로 돈푼깨나 받았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고 △주교 임명제청권을 앞세워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르고 △대사라는 직분을 이용해 서울성모병원을 안방 드나들듯 하며 △군대를 가지않고 군대문화를 모르는 이를 군종교구장으로 임명했다고 주장했다.&lt;/p&gt;
&lt;p&gt;&lt;br /&gt;　사제들은 또 “새 서울교구장이 선임된 뒤 주교 후보자로 15명의 사제 이름이 돌았는데 누가 후보자인지 모두 알게 됐고, 끝으로 추천된 3명의 후보자 중에는 술과 여자 문제가 있는 사람도 있었다”고 비판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 align=&quot;center&quot;&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477/177/%ED%95%A8%EC%84%B8%EC%9B%85%20%EC%8B%A0%EB%B6%80-.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384&quot; alt=&quot;함세웅 신부-.jpg&quot; title=&quot;함세웅 신부-.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p&gt;
&lt;p align=&quot;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x&quot;&gt;함세웅 신부.&amp;nbsp; 사진 &amp;lt;한겨레&amp;gt; 자료&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br /&gt;　함 신부는 “한국천주교와 사제들이 깊이 성찰하고 초심으로 돌아가자는&amp;nbsp; 마음에서 내용을 소개한다”며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용기 있는 사임과 프란치스코 새&amp;nbsp; 교황의 쇄신 의지에 비춰 사제들의 지적은 부끄러움을 일으킨다”고 말했다.&lt;/p&gt;
&lt;p&gt;&lt;br /&gt;　한편 주한교황청쪽은 이에 대한 반론요청에 응하지 않았다.&lt;br /&gt;&lt;/p&gt;
&lt;p&gt;&amp;nbsp;조현 종교전문기자 &lt;a href=&quot;mailto:cho@hani.co.kr&quot;&gt;cho@hani.co.kr&lt;/a&gt;&lt;/p&gt;
&lt;p&gt;&amp;nbsp;&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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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헌신 없는 종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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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3-05-15T18:12:41+09:00</published>
      <updated>2013-05-16T10:42:28+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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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박기호 신부</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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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align=&quot;center&quot;&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099/177/%EB%B0%95%EA%B8%B0%ED%98%B8%20%EC%8B%A0%EB%B6%80-.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00&quot; alt=&quot;박기호 신부-.jpg&quot; title=&quot;박기호 신부-.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p&gt;
&lt;p align=&quot;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x&quot;&gt;소백산 산위의마을 촌장 박기호 신부&amp;nbsp; 사진 조현&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　&lt;/p&gt;
&lt;p&gt;&lt;strong&gt;자신의 명예와 소유 안내려놓고 &lt;br /&gt;대물림까지 하려드는 종교인들 &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인간 삶에 기여 망각하면 ‘사회악’ &lt;br /&gt;희생과 헌신, 근본으로 돌아가자&lt;/strong&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종교인들의 문제나 교회 내 갈등이 종종 세간의 화제다. 그 때마다 필자는 김수환 추기경이 생존 시 사제피정에서 했던 말씀을 회상하곤 한다. &lt;br /&gt;&lt;/p&gt;
&lt;p&gt;　“세계적으로 한국만큼 사제생활 하기 좋은 나라가 없다고 해요. 외국인 선교사가 내게 말하기를, ‘한국은 성직자 생활의 파라다이스다!’ 하더라고. 정말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부족해서 온전히 헌신하지 못하는지를 반성해야 합니다.”&lt;br /&gt;　우리 국민들의 종교에 대한 공경심과 교직자에 대한 우대의 정서는 남다른 전통이다. 그것은 종교다원주의에서 마치 종교 엑스포를 이룰 만큼 성장하게 만든 배경이자 동시에 다종화 대형화 기업화 하는 부정적 현상의 환경이라고도 생각된다. &lt;/p&gt;
&lt;p&gt;&lt;br /&gt;　근래 한국의 종교사회는 지성의 뭇매를 맞고 있다. 종교 자체가 아니라 정확히 말해서 종교 교직자, 지도자들의 생활과 운영과 이념적 태도들이 그 대상으로 보인다.&amp;nbsp;&amp;nbsp;인터넷 등 새로운 환경으로 불특정 다수의 견해가 여과도 예의도 없이 출몰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원천적 사실들까지 관면 받을 수는 없다.&amp;nbsp; 폭로와 질책으로 상처받고 권위가 망가지는 것은 물론 두려움의 위협도 될 것이다. 그러나 생각건대 비판하고 질책한다는 것은 애증을 전제로 한 것이니 무관심보다 더 무섭기야 하겠는가? 종교인에 대한 지탄을 넘어 종교 자체에 대한 무관심의 계절이 올 것만 같다. 이 준엄한 죄업을 무엇으로 감당할 것인고. 두렵다!&amp;nbsp; &lt;/p&gt;
&lt;p&gt;&lt;br /&gt;　동서고금의 종교 역사가 늘 그런 질곡과 부침의 궤적을 가지고 있다. 민중 혁명의 불세례를 받아 개처럼 패대기 당해 쫓겨나기도 했고 더러는 처형도 당했다. 교단에서는 ‘증거와 순교의 역사’로 미화할 수야 있겠지만 그건 궁색하다. 종교가 권력과 부자의 편에서 억압과 불평등을 동조 방관했던 태도에 대한 심판이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더러는 민중의 희망과 신뢰의 유일한 의지처가 되어준 역사도 있다.&amp;nbsp;&amp;nbsp; &lt;/p&gt;
&lt;p&gt;&lt;br /&gt;　마하비라, 공자, 석가, 예수, 모하멧에서 현대 종단까지, 종교의 숭조들은 역사의 실존 인물이면서 동시에 시대가 낳은 정신이기도 하다. 사회적 삶이 도탄에 빠지고 순리가 부정되는 현상이 지속될 때는 어김없이 예언자와 성현과 선각과 큰 스승들이 나타났었다. &lt;br /&gt;　종교 지도자라면 모름지기 시대 현상에 나타난 영적 정신적, 문화적 징표를 읽는 영성의 눈을 가져야 대안의 지혜를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니 그 영성을 얻으려는 것이 수행의 목적이다. 무욕과 청빈에 담긴 영성의 삶은 재물이나 권력 명예와는 공존불가의 물건이다. &lt;/p&gt;
&lt;p&gt;&lt;br /&gt;　신도들은 자기 신앙을 향도하는 교직자들이 오로지 영성의 삶에 전임 진력을 요구하며 대신 수행과 증거사업에 필요한 재정을 부담하겠다는 의무감으로 예물을 봉헌한다. 청원기복의 제물이건 건축기금이건 감사예물이건 성격은 동일하다. &lt;/p&gt;
&lt;p&gt;&lt;br /&gt;　 시대의 징표를 읽고 회개를 외치는 예언자 기능이 종교에서 지성들에게로 옮겨가고 있다. 그러려고 돈 들여 공부한 것이니 마땅하고 옳은 현상이다. 문제는 시대를 읽어야 할 종교인들의 눈에 실명이 오고 있다는 것이다. 수행에만 너무 전념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세상의 향유에 정신 팔고 있기 때문일까?&amp;nbsp; 따악! 내리치는 죽비 소리가 크다.&amp;nbsp;&amp;nbsp; &lt;/p&gt;
&lt;p&gt;&lt;br /&gt;　종교인이 신도의 예물을 받을 때라면 늘 자신이 받은 돈의 성격을 관상(觀想)해볼 의무가 있다. 돈에는 초상화의 눈이 있고 혼이 담겨 있다. 신자가 땀 흘려 노동하여 내는 예물의 혼과 부정한 재물에서 떼어내 바치는 돈의 혼이 결코 같지 않다. 부와 권력을 가진 상류 인텔리 계층의 신자가 내는 예물에는 그들의 혼과 소망이 담겨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와 파출부와 편의점 알바를 하는 젊은이가 내는 예물에는 그들의 눈물과 희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 align=&quot;center&quot;&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099/177/%EB%AC%BC%EB%A0%88%EB%8F%8C%EB%A6%AC%EB%8A%94%EA%B0%84%EB%94%94-.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50&quot; alt=&quot;물레돌리는간디-.jpg&quot; title=&quot;물레돌리는간디-.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p&gt;
&lt;p align=&quot;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x&quot;&gt;물레를 돌리는 간디&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br /&gt;　그들은 신의 제단 앞에서 공평하다. 모두가 한 분 아버지의 자녀이고 형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는 다른 것은 예물의 금액이다. 교직자들은 과연 그들 모두를 형제로서 공평하게 대할 수 있을까? 누구를 편들게 되어 있을까? 정답은 ‘평소에 누구와 더 자주 만나고 식탁에 자주 앉고 값진 선물을 자주 받는가?’ 이다. 두 형제 중에 누구의 소망과 정서가 교직자의 마음을 얻고 뼈 속까지 차지할 것 같은가? 이것은 종교인들의 불편한 진실이다. &lt;/p&gt;
&lt;p&gt;&lt;br /&gt;　이렇게 해서 같은 교단의 교직자로서 운명이 갈라지는데, 어떤 이는 체육관처럼 모인 신도들 앞에서 진보 좌파를 신앙의 적으로 선포하는 열광적인 설교를 하고, 외제 승용차와 고급 레스토랑의 고품격 식사를 대접받고 최고 상류층과 교재 한다. 그들은 교직자의 기념일을 잘 기억하고 축하해 주는 정성도 있다.&amp;nbsp; 반면에 어떤 교직자는 주일인데도 겨우 얼마 안 되는 소수의 신도들과 예배를 드리며 북녘 동포 돕기 저금통을 돌리고, 잔치국수를 나누어 먹고 헤어진다.&amp;nbsp; 그런데 신자들 사이에 정치적 논쟁이 생기고 선거 때가 되면 교회는 누구 편을 들어야 하는가? 단, 예수에게는 중립이 없었다! &lt;/p&gt;
&lt;p&gt;&lt;br /&gt;　아무래도 “나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예수의 말씀이 씨가 된 듯하다. 바오로 사도는 “대사제는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친다.”고 했다. 사제는 자신의 몸을 제물로 내어놓는 자다. 그래서 예수를 ‘대사제’라고 부른다. 세상과 하늘을 화해시키고자 자기 목숨을 제물로 내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종교인들은 자신의 결정권과 명예와 소유는 결코 내려놓지 않고 외려 대물림까지 하려 든다. 신도들에게는 헌신과 헌납을 독려하지만 스스로는 자신을 내어 놓지 않는다. &lt;/p&gt;
&lt;p&gt;&lt;br /&gt;　인도의 간디는 “나는 그리스도는 좋지만 그리스도인은 좋아하지 않는다!” 하면서, 희생 없는 제사, 헌신 없는 종교를 ‘사회악’이라 지탄하였다. 예수와 그 추종의 집회 사이에 큰 간극이 벌어져 있음을 통박하는 말이다. 이미 70여 년 전 간디의 생각일진데 오늘날 우리 종교 사회의 모습을 성찰하는데 왜 이렇게도 낯부끄럽고 민망스러운가? &lt;/p&gt;
&lt;p&gt;&lt;br /&gt;　우리 사회는 정신세계의 붕괴로 인한 중증 질환으로 신음하고 있다. 글로벌 시대의 착취와 압제가 진군한다. 성과주의 사회의 피로 누적과 좌절감으로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닌 집단 우울증과 자살이 집단 증후군을 이루고 있다. 물신의 우상과 향락과 명품주의 소비문화로 영혼과 정신을 포박하고 가위 누르는 악령의 손길이 바이러스처럼 창궐하고 있다. &lt;/p&gt;
&lt;p&gt;&lt;br /&gt;　대가족과 노동의 삶은 해체되어 집은 있어도 삶이 없고 가족은 있어도 가정이 없다. 시민의 권리와 자유는 있으되 책임은 없다. 공동체적 가치들이 샅샅이 해체되고 있다. 남북분단에 동서로 갈라지고, 보혁 빈부(保革 貧富)로, 명문 학벌주의와 지역우월주의로 갈라져 투석전을 벌이는 시대, 이념도 사상도 아닌 막연한 편견과 감성적 선정적 호불호의 아집으로 정치의식이 파멸을 맞고 있다. 천명을 받든 종교인이라면 잠을 이룰 수 없는 시국일진데 기껏 생활 태도를 놓고 다툼이나 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참담하지 않는가? 이건 정말 낭패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align=&quot;center&quot;&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099/177/%EB%B0%95%EA%B8%B0%ED%98%B8%EA%B8%80%20%EC%9D%BC%EB%9F%AC%EC%8A%A4%ED%8A%B8-.jpg&quot; width=&quot;590&quot; height=&quot;501&quot; alt=&quot;박기호글 일러스트-.jpg&quot; title=&quot;박기호글 일러스트-.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p&gt;
&lt;p align=&quot;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x&quot;&gt;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lt;/span&gt;&amp;nbsp;&lt;/p&gt;
&lt;p&gt;&lt;br /&gt;　어디서부터 문제일까? 바둑에는 복기라는 것이 있다. 수를 잘못 읽은 지점을 찾는 것이다. 존경도 받고 제물도 받는 것에 익숙해지고 관성에 빠져 자기다움과 목적성을 잃어버린 문제로 보인다. 종교가 종교다움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더 이상 존재이유가 없는 사형선고다. 존재할 이유도 없는 것이 성장을 계속하면 괴물 밖에 더될까? 어떤 이는 영상에 등장한 모습이 실제 괴물로 보였다는 이도 있다. &lt;br /&gt;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이 낙원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살게 하였는데, 아담과 하와는 불만족의 유혹에 넘어가 파라다이스의 완성을 추구했고, 즉시 추방당했다. 바벨탑도 소돔과 고모라 도시도 모두 자신들의 천국을 누리고자 함에 내린 재앙이었다. 종교인은 종교를 파라다이스로 여기는 순간 타락이란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간디의 일곱 가지 사회악, 그 어떤 사회적 가치도 인간 삶의 발전에 기여하는 목적성을 잃어버리면 악의 기능만 남는다는 훈화를 기억해 두자. &lt;/p&gt;
&lt;p&gt;&lt;br /&gt;　근본으로 돌아가자!&amp;nbsp; 자신을 제물로 내어놓는 희생과 헌신에 종교의 정체성이 빛난다.&amp;nbsp; 거듭남을 위해 살을 깎는 각오는 그 자체로 고행이다. 그러나&amp;nbsp; 고행 극기란 모든 종교의 필수적 전통이며 존재방식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 종교의 거듭남의비방(秘方)으로 ‘100일 동안 쑥만 먹어야 한다!’ 면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사는 길이다.&lt;/p&gt;
&lt;p&gt;&amp;nbsp;&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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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유철주의 &lt;진광불휘&gt;</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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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3-05-15T08:04:29+09:00</published>
      <updated>2013-05-15T08:19:49+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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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휴심정</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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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amp;nbsp;&lt;/p&gt;
&lt;p align=&quot;center&quot;&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768/176/%EC%A7%84%EA%B4%91%EB%B6%88%ED%9C%98-.jpg&quot; width=&quot;360&quot; height=&quot;518&quot; alt=&quot;진광불휘-.jpg&quot; title=&quot;진광불휘-.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한국불교 차세대 리더 19명 인터뷰&amp;nbsp; &lt;br /&gt;미산·미등·정념·금강·원철·혜민 스님 이야기 담은 ‘진광불휘’&amp;nbsp; &lt;/strong&gt;&lt;/p&gt;
&lt;p&gt;&lt;br /&gt;참된 빛은 번쩍이지 않는다(眞光不輝). 책 &amp;lt;진광불휘&amp;gt;는 화려하진 않지만 한국불교를 비추는 ‘빛’을 담은 책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책에는 저자 유철주 기획팀장(백련불교문화재단)이 지난 한해 노염과 혹한 속에서 사찰을 찾아 제각각의 자리에서 한국불교 미래를 일구고 있는 스님 19명 인터뷰가 담겨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서울 상도선원 미산 스님, 고창 선운사 법만 스님, 구미 도리사 묘장 스님, 울진 불영사 일운 스님, 서울 봉은사 진화 스님, 前 조계종 불교문화재연구소장 미등 스님, 문경 한산사 용성선원 월암 스님, 곡성 성륜사 무상 스님, 순천 송광사 율원장 도일 스님, 문경 대승사 철산 스님, 조계종 교수아사리 원영 스님, 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각묵 스님, 서울 흥천사 정념 스님, 자비명상 지도법사 마가 스님, 선재사찰음식문화연구원장 선재 스님, 해남 미황사 금강 스님, 정토사관자재회 능행 스님, 前 조계종 불학연구소장 원철 스님, 美 햄프셔대 교수 혜민 스님 등.&lt;/p&gt;
&lt;p&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 &lt;br /&gt;책은 미래·지혜·전법으로 나눠 제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하시는 분들의 출가인연, 은사스님과의 일화, 공부하던 시절의 치열했던 구도열, 어떻게 전법해야 하는지 등을 스님들 각각의 목소리로 나눠 기록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저자는 “인터뷰를 하면서도 느꼈지만, 한 분 한 분 모두 치열하게 수행했다. 그리고 지향하는 바가 뚜렸했다. 19명 스님의 현실에 대한 냉철한 고민, 진실로 대중과 불법을 위하는 마음, 깨달음에 대한 각각의 생각은 분명하고도 깊었다. 책 제목이 ‘진광불휘’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라고 말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진광불휘┃유철주 지음┃담앤북스┃1만7000원&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조현성 기자&lt;/p&gt;
&lt;p&gt;&amp;nbsp;&lt;strong&gt;이글은 &amp;lt;불교닷컴&amp;gt;에 실린 기사입니다.&lt;/strong&gt;&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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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철학자 강신주가 본 불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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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3-05-14T13:31:39+09:00</published>
      <updated>2013-05-14T13:31:39+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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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휴심정</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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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6px; color: rgb(0, 117, 200);&quot;&gt;“불교는 저마다 주인 돼 개성있는 꽃으로 피어나는 것”&amp;nbsp;&lt;/span&gt;&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부처님오신날 특집-철학자 강신주 불교를 말하다&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2013.05.13 법보신문 &amp;nbsp;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대학원 시절 중론 읽으며 불교입문&amp;nbsp;&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20년 동안 각종 논서·선어록 읽어&amp;nbsp;&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나가르주나·임제 스님 좋아하고&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일체 권위 털어버린 선종에 매료&lt;/b&gt;&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115/176/%EB%B2%95%EB%B3%B4%EA%B0%95%EC%8B%A0%EC%A3%BC1.jpg&quot; width=&quot;533&quot; height=&quot;360&quot; alt=&quot;법보강신주1.jpg&quot; title=&quot;법보강신주1.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 font-size: 12px;&quot;&gt;&amp;nbsp;&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 font-size: 12px;&quot;&gt;▲ 강신주&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 출판가에서 인문학 서적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사람이 새삼 중요해진 것인지, 아니면 사회의 부품으로 전락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고준한 담론과 옛 전통의 권위에 기대 자신을 치장하는 화장품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사람을 향해야 하는 인문학 본래의 의미는 사라지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장식물이나, 취직이나 진급을 위한 스펙으로 전락한 감이 없지 않다. 인문학마저 돈벌이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이 아프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이런 인문학의 이상 열기 속에서 주목받는 인물이 있다. 철학자 강신주(47). 인문출판계에서 그의 존재감은 두드러진다. 2011년 출간된 그의 책 ‘철학이 필요한 시간’(사계절)은 10만부가 넘게 팔렸다. 철학책으로 드문 성공이다. 그는 하루에 2.5개의 강의를 소화하고 지금까지 20권에 가까운 책을 펴냈다. 한 달에 20일을 지방에서 보내고 있다. 대중들은 그를 원하고 그는 그런 대중들을 위해 촌음을 쪼개 치열하게 살고 있다. 그는 대중들에게 인문학으로 들어가는 문이자 지름길이다. 그의 말과 글에는 사람을 향한 따뜻함이 있다. 사람에 대한 사랑, 자유, 주인됨 이것이 그의 철학의 핵심이다. 그는 대중들의 고통을 미사여구로 위로하지 않는다. 본질을 건드려 원인을 직시하게 한다. 스스로 해결점을 찾게 한다. 그래서 인문학의 화장품을 얻으려고 접근했던 대중들도 그의 글을 접하면 인문학의 본래 매력에 푹 빠져들게 된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철학자다. 연세대 화학공학과 출신이지만 서울대와 연세대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연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장자 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곧 강단을 내려와 강연과 저서를 &amp;nbsp;통해 저자거리에서 대중과 만나고 있다. 그래서 이름 앞에는 대중철학자, 현장철학자, 거리철학자라는 별칭이 따라 붙는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에게 인문학의 정신은 불교와 다르지 않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은 사람사람이 꽃처럼 피어나야 하는 인문학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그는 대학원 시절 나가르주나의 ‘중론’으로 불교에 입문했다. 이후 각종 논서와 선어록을 읽었다. 그는 선불교를 특히 좋아한다. 일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주인이 되는 선불교의 정신에서 인문학의 극치를 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불교가 진보적이고 혁명적이라고 말한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부처의 자비라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다. 사랑을 하면 진보적으로 바뀐다. 사랑을 할 방법을 찾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억압하는 구조를 바꾸려고 한다. 만약 중생의 고통이 자본이나 왜곡된 권력구조에서 오는 것이라면 불교는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 나서야 한다. 그것이 불교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는 기질적으로 임제 스님을 닮았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말은 직설적이다. 포장하지 않는다. 특히 사람을 억압하는 자본주의 구조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이론과 실천이 함께 가는 지식인의 삶을 엿보게 한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는 본지에 매주 ‘무문관’을 연재하고 있다. 불교관련 연재로는 처음이다. 과거와 현재, 동서양을 회통하고, 대중의 삶에 비춰 풀어낸 그의 글쓰기는 ‘선문답’같은 선어록을 생활 속 우리 이야기로 조명해 내고 있다. 그는 요즘 불교와의 인연에 주목하고 있다. 지난해 스님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데 이어 법보신문 연재까지, 불교와의 만남이 갈수록 잦아지고 있다. 특히 ‘임제록’을 대중적으로 풀어보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amp;nbsp;&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 불교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대학원 석사 과정 때 불교를 처음 접했다. 나가르주나의 중론(中論)’을 읽었다. 충격적이었다. 거대한 산을 마주한 것 같았다. 뭐 이런 게 있지. 이걸 어떻게 넘어야 하나. 재미있기는 한데 정말 어려웠다. 그래서 반드시 극복해야겠다는 호승심이 일었다. 정신없이 빠져 들었다. 또 다른 세계를 만난 느낌이었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 주로 어떤 종류의 불서를 읽는지.&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논서(論書)들을 좋아한다. 중론을 읽고 바수반두의 유식(有識)을 공부했다. 원효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도 봤다. 주로 논서를 다양하게 읽었다. 반면에 ‘화엄경’이나 ‘법화경’은 좋아하지 않는다. 불교의 가르침을 문학적으로 잘 풀어낸 것은 좋은데,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 그러면서 대충 퉁 치고 넘어가버린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 중론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 난해한 논서를 대중적으로 풀어 쓸 수 있을까.&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이론적으로 접근해야 하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풀어쓰기가 참 어렵다. 논리의 귀결이 ‘공(空)’인데 지금 법보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무문관도 마찬가지다. 결론은 마음의 집착을 없애고 주인공이 되라는 이야기다. 결국 디테일의 문제다. 게송 하나하나의 결론이 같다하더라도 그렇게 되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런데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을 보면 두루뭉술하게 설명하고는 결론을 내 버린다. 중론은 꼭 한번 써 볼 생각이다. 그러나 중론은 학술적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는 점이 고민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스스로 나가르주나가 돼서 써 볼 생각이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 글쓰기에 뚜렷한 특징이 있는 것 같다. 연재 중인 ‘무문관’만 하더라도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철학,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 것인가가 항상 빠지지 않는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이다.&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인문학(人文學)은 사람에 관한 학문이다. 인문학자나 철학자들은 애정을 가지고 대중을 바라본다. 그래서 하나라도 더 들려주고 싶어 한다. 글은 읽으라고 쓰는 것이다. 삶에 도움이 돼야 한다. 글쟁이의 도리다. 글 쓰는 사람이 내용을 확실히 소화하면 같은 내용을 아이에게도 설명할 수 있고 교수들에게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그럴 때 글을 써야 한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 ‘무문관’을 풀어쓸 때 어디에 핵심을 두고 있나.&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스스로 부처가 되고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항상 고민한다. 되도록 복합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글에 서양 철학이 들어가고 동양의 사유가 들어가는 것은 서양에 관심 있는 사람, 동양을 중시하는 사람 모두 경청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무문관이 불립문자를 표방하는 선어록이지만 불교의 역사와 중요한 교리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한다.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다. 어찌됐든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고 사회에도 도움이 되는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사람이 권위에 굴종하고 집착의 노예가 돼서는 안 된다. 사람사람이 꽃처럼 개성 있게 피어나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다. 같지만 다른 부처가 되고 주인이 되는 길. 그것을 알려주고 싶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 서구 사상에 익숙한 사람들은 불교를 이해하기가 힘들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전혀 그렇지 않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인도유럽어족의 토대에서 발생했다. 한문보다는 서양언어와 가깝다. 언어가 사유체계를 구성한다. 인도와 서구의 글과 말의 뿌리가 같기 때문에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오히려 서양철학을 잘 알아야 한다. 동양이 가지고 있는 표현방법, 즉 레토릭(rhetoric, 수사학)은 불교를 설명하기에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언어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오해가 생기기 쉽다. 중국인들이 그렇게 많은 세월을 번역에 매달렸던 것도 이런 고충 때문이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 인문학자 입장에서 보는 불교는 어떤가.&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불교를 보면 담론이 언제 만들어졌는지가 결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불교는 현재도 세련돼 보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절대 낡아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불교의 정신이 굉장히 레디칼(급진적)하고 혁명적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제도나 관념을 유지하려는 것을 보수라고 한다면 불교는 진보적이다. 이성복 시인이 이런 말을 했다.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멋지지 않은가. 짜장면을 좋아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면 제사상에 짜장면을 놓아야 한다. 홍동백서(紅東白西)를 올려서는 안 된다. 아버지를 사랑했다면 짜장면을 올릴 수밖에 없다. 누구를 사랑하면 그 사람을 기쁘게 할 방법을 찾아내게 된다. 이미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이다. 부처님의 자비도 다르지 않다. 중생을 사랑하기에 사랑할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래서 진보적이다. 과거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다. 기존의 이념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중심인데 사람을 보지 않는다. 또 사랑을 하게 되면 반드시 행동을 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과 안락을 위해서. 그런 점에서 불교는 인문적이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한국불교는 선의 전통이 강하다. 불교에서 선이 가진 의미는 무엇일까.&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스승을 죽이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도 조사의 가르침도 도움은 되지만 근본적으로 죽여야 한다. 선불교는 철저하게 싯다르타 부처님의 정신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나가르주나의 정신이기도 하다. 교종은 지적인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고 오랫동안 공부한 사람이 존중을 받는다. 스펙 싸움이다. 선불교는 이런 고리를 끊어 버렸다. 레비스트로스(1908~2009)는 계급이 나뉜 것은 문자가 생기면서부터라고 말했다. 뛰어난 통찰력이다. 문자가 생기면서 유식과 무식이 나뉘고 지식이 권력이 됐다. 억압된 사회가 등장했다. 선종은 이런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렸다.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면서 근원적으로 붕괴시켰다. 문자로부터 발생된 억압된 구조를 해체시켜 버린 것이다. 백장 스님은 죽기 전까지 대중들과 평등하게 노동을 했다. 선종이 아니라면 어떻게 큰스님이 노동을 할 수 있겠나. 이런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는 정신, 이것이 선의 정신이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그렇지만 조계종은 옛 선불교의 정신에서 변질됐다는 지적이 있다. 선종을 표방하는 종파일수록 계보를 따지고 전통과 권위를 따짐으로써 어떤 측면에서 교종보다 더 무서운 억압된 구조라는 것이다.&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맞는 말이다. 그런 측면이 있다. 교종은 경전을 가지고 따지기라도 하는데 선종은 ‘직접 해봐’ 하면서 설명도 안 해 준다. 어려운 점이 있다. 그래서 지금의 조계종은 로마 가톨릭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권위적이다. 이런 모습은 불교의 정신과는 맞지 않다. 불가피한 점들은 있다. 이런 조직이라도 있으니 스님들을 공부시키고 키워내는 것 아닌가. 그렇지만 결국은 바로잡아야 한다. 되도록 간결한 구조가 돼야 한다. 종단의 이름으로 권세를 누려서는 안 된다. 낮은 곳을 향해야 한다. 자비심을 회복해야 한다. 조계종을 사랑하지 말고 중생을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권위구조를 해소할 수 있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불교는 종파가 너무 많다. 경전도 많고. 그래서 번잡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교리를 단순화시켜야 한다. 아직도 한문으로 된 경전들을 읽으니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힘들다.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정한 줄기를 세울 필요가 있다. ‘육조단경’이나 ‘임제록’ 같은 선어록으로 시작하면 좋을 것 같다. 옛날 사람들처럼 ‘구사론’ 몇 년, 또 어떤 경전 몇 년 이렇게 공부할 수는 없다. ‘육조단경’은 쉽고 재미있다. 에피소드도 많고 소설처럼 읽을 수 있다. 수만 권의 경전을 명료하고 간략하게 요약한 선불교의 전통이 잘 담겨 있다. ‘임제록’도 ‘무문관’도 불교의 핵심을 잘 담고 있다. 선어록은 같은 깨달음의 꽃이 어떻게 다양하게 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불교의 핵심을 배우기에 이보다 좋은 경전도 없을 것이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lt;span style=&quot;color: rgb(58, 50, 195);&quot;&gt;“불교는 인문 정신의 극치…사랑하면 주인이 된다”&lt;/span&gt;&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115/176/%EB%B2%95%EB%B3%B4%EA%B0%95%EC%8B%A0%EC%A3%BC2.jpg&quot; width=&quot;360&quot; height=&quot;533&quot; alt=&quot;법보강신주2.jpg&quot; title=&quot;법보강신주2.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 font-size: 12px; color: rgb(28, 72, 39);&quot;&gt;▲그는 “불교가 사회와 소통하는 길은 곧 우리 사회의 고통을 직시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 font-size: 12px; color: rgb(28, 72, 39);&quot;&gt;그리고 고통의 원인인 불평등하고 억압된 사회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 font-size: 12px; color: rgb(28, 72, 39);&quot;&gt;사회의 고통을 개인의 고통으로 떠밀지 않고, 사람들이 스스로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환경을 바꾸는 것.&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 font-size: 12px; color: rgb(28, 72, 39);&quot;&gt; 이것이 곧 시대가 요구하는 불교의 역할이라는 설명이다.&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불교목적은 스스로 부처되는 것&amp;nbsp;&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참으로 알게 되면 실천하게 돼&amp;nbsp;&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청춘들 아픔은 사회구조적 고통&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불교가 사회적 고통해결 나서야&amp;nbsp;&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대중에 대한 측은지심 글 동력&amp;nbsp;&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임제록 편하게 풀어내고 싶어&amp;nbsp;&lt;/b&gt;&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선종은 불교의 본래 모습에서 벗어난 중국화 된 불교라는 비판이 있다.&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렇지 않다. 선종의 전설과 관련해서는 허풍이 없진 않다. 그러나 정신만은 싯다르타 부처님의 전통으로 돌아간 것은 분명하다. 초기경전인 ‘법구경’에서 부처님이 제자들과 함께 탁마하던 그 전통이 그대로 복원됐다. 선종은 스스로 수행해서 성불하는 것이다. 공유된 언어도 해체해 버려 특정종파를 만들기도 쉽지 않다. 권위가 생길 수 있는 구조를 근본적으로 붕괴시켜버렸다. 그래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수행의 전통을 복원해 냈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지금도 한역경전을 읽고 있다. 제대로 된 우리말 경전은 여전히 부족하다. 불자들이 경전을 읽기가 힘드니까 교학적인 부분이 취약해지고 기복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경전을 반드시 우리말로 번역해야 한다. 처음부터 완성된 번역본이 나올 수는 없다. 기독교 성서만 해도 번역본이 나온 뒤 개선본이 계속 나왔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번역을 해 놓고 계속 개선본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담론도 생기고 점차 세밀해진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불교 경전이 지나치게 많기 때문에 번역에 공력이 많이 든다. 그런 현실적인 부분도 있는 것 같다.&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경전이 정말 많다. 불교가 누구나 성불할 수 있는 종교이기 때문에 그렇다. 기독교 성서는 하나밖에 없다. 통째로 암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유와 자유로움이 없다. 불교는 깨달으면 누구나 경전을 쓸 수 있다. 부처님의 말씀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신의 말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장 중생의 고통을 덜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이 많으니 그만큼 고통의 종류도 많고 그 고통들을 해결하려니 여러 경전들이 필요했다. 불교는 이토록 자비롭다. 그렇지만 역시 앞서 밝힌 것처럼 초심자들을 위해 경전의 순서를 정할 필요는 있다. 꼭 필요하면서도 근본적인 경전을 우리말로 풀어서 내놓아야 한다. 스님들의 노력이 중요하다. 의타적인 경전들보다는 스스로 깨달음의 길을 갈 수 있는 경전들을 먼저 우리말로 잘 번역해 내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선의 정신이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깨달았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나. 앎과 실천은 다르지 않나.&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진짜로 알고 있는 것과 가짜로 알고 있는 것은 다르다. 진짜로 알게 되면 실천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난로가 뜨겁다는 것을 안다면 절대 만지지 않는다. 데일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제대로 알면 앎과 삶이 함께 가는 것이다. 이것을 성철 스님은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말했다. 돈오가 참다운 앎이라고 했을 때 그것으로 족하다. 다른 닦음이 필요 없다. 그러면 왜 아이들은 난로가 뜨겁다고 말해줘도 만질까. 이것은 모르기 때문이다. 듣기만 한 것이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사회는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는데 한국불교는 과거를 답습하면서 길을 잃어버린 것 같다.&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공부를 안 하는 스님들이 많다. 자비심도 부족하다. 산을 오르다가 절에 들러 스님들의 법문을 들으면 과연 불교를 알고 하는 법문인지 한심할 때가 있다. 무지한 스님과 몽매한 대중들의 만남이랄까. 이것이 한국불교의 수준이다. 스님들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회복해야 한다. 대중들과 만나기 위해서는 경전 못지않게 사람을 공부해야 한다. 정신분석학 같은 학문도 필요하다. 그래야 사람을 이해하고 고통을 덜어주고 품어줄 수 있다. 대중들의 지적 수준이 급속하게 높아졌다. 아직도 절이나 하라는 식의 불교는 버려야 한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조계종이 선종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사교입선(捨敎入禪) 아닌가. 그래서 무지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래서 보조 스님의 고민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보조 스님은 당시 스님들에게 무지한데 난폭함을 깨달음의 징표라 생각하고 몽둥이질이나 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이를 치선(癡禪)이라고 한다. 어리석은 선이다. 보조 스님의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등을 보면 돈오돈수를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말한다. 현실적인 고민이 있었던 거다. 깨달았다고 주장만 하지 말고 공부 좀 하라는 말이다. 선불교는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 내기가 어렵다. 객관적인 평가 잣대가 없다. 교종은 시험이라도 보는데 선종은 그게 안 된다. 인가라는 것도 개별적이다. 결국 스스로를 속이면 안 된다. 지금 조계종은 선의 정신, 즉 마조, 황벽, 백장, 임제로 내려오는 그 힘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만약 불교가 의타종교나 초월종교였다면 이미 쓰러졌을 것이다. 선불교의 정신 때문에 남아있는 것이다. 교단을 비판하고 부정을 해도 흠이 되지 않는다. 이런 비판정신, 자유로움이 있기에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이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요즘 불교 힐링이 인기다. 힐링 열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스님들이 좀 기다려야 한다. 처소에 진득하게 앉아있으면서 스스로 고통을 들고 온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한다. 저자거리로 나가서 이런 고통 저런 고통이 있으니 이것을 해결해야 한다고 떠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의사가 병원에 있어야지 거리에 나와 있으면 자칫 병을 파는 사람이 되기 쉽다. 오히려 공포감만 조성된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그렇다면 불교가 사회와 어떻게 소통해야 하나.&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강제로 소통하면 폭력이다. 요즘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개인의 실존적인 고통이라기보다 대부분 불합리한 사회구조로부터 오는 고통이다. 자본과 권력에 의한 고통으로 비정규직 문제가 대표적이다. 지금 청년들이 겪는 고통은 실존의 고통이 아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박탈감에서 오는 아픔이다. 이런 사회적인 고통을 직시해야 한다. 보다 큰마음, 자비로운 마음으로 불평등하고 억압된 사회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불평등한 사회구조로부터 오는 고통을 자꾸 개인의 고통으로 돌아보게 하면 안 된다. 이러면 진실이 가린다. 사람들이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환경을 바꾸는 것. 이것이 불교가 사회와 소통하는 길이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존경하거나 롤 모델로 생각하는 불교인이 있나.&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나가르주나, 원효, 임제 스님. 세 분을 좋아한다. 특히 나가르주나를 가장 좋아하는데 자신도 베일 각오로 칼을 만드는 그 냉철함에 항상 감탄한다. 데이비드 흄(1711~1776)이란 철학자의 글을 읽다 나가르주나 ‘관인연품(觀因緣品)’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흄보다 한참을 더 깊이 들어가 있었다. 거대한 산맥을 만난 느낌이었다. 그 깊이가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았다. 지금은 ‘중론’을 편하게 읽는다. 그래도 항상 새롭다.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깊이 들어가는 느낌이다. 그렇더라도 기질적으로는 임제 스님과 많이 닮았다. 강의 때 임제 스님처럼 사람들을 격동시키는 것을 좋아한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대중적으로 써 보고 싶은 불교 책이 있는가.&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임제록’을 대중적으로 써보고 싶다. 나가르주나의 ‘중론’도 써보고 싶다. 조바심도 있다. ‘중론’이나 ‘임제록’에 나름의 통찰을 갖기까지 20년이 걸렸다. 그래서 성과들을 정리해서 대중들에게 쉽게 전달하는 기회를 가지려고 한다. 초창기에 불교와 관련된 책들을 쓰지 않았지만 이제 인연이 온 것 같다. 불교는 만만치 않다. 궁극적으로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때 불교를 볼 수 있게 된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하루에 2~3개의 강의를 소화하고,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대중적인 인문서적을 펴내고 있다. 왕성한 활동력의 원동력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대중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많이 주고 싶다. 몇 년 전부터 갑자기 인문학 열풍이 불었다.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그렇지만 5~6년 정도면 그 열기가 식을 것이다. 그 전에 부지런히 알려야 한다. 유통기한 동안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죽을 때 이제 푹 쉬어야지하고 미련 없이 떠나려고 한다. 불교와 관련된 일은 앞으로 많이 해보려고 한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6px;&quot;&gt;*이 글은 법보신문에 실린 것입니다.&amp;nbsp;&lt;/span&gt;&lt;/b&gt;&lt;/div&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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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새로 깨달은 지천명(知天命)의 뜻</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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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3-05-14T13:19:25+09:00</published>
      <updated>2013-05-14T13:19:25+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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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이남곡</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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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lt;span style=&quot;color: rgb(13, 81, 76);&quot;&gt;&lt;br /&gt;&lt;/span&gt;&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lt;span style=&quot;color: rgb(13, 81, 76);&quot;&gt;국경선 평화학교에서 논어를 이야기하다&lt;/span&gt;&lt;/b&gt;&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082/176/dmz%EC%88%98%ED%95%99%EC%97%AC%ED%96%89%ED%95%9C%EA%B2%A8%EB%A0%88%EC%82%AC%EC%A7%84.jpg&quot; width=&quot;533&quot; height=&quot;400&quot; alt=&quot;dmz수학여행한겨레사진.jpg&quot; title=&quot;dmz수학여행한겨레사진.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x; color: rgb(43, 40, 95);&quot;&gt;*비무장지대 인근에 수학여행 온 학생들. 한겨레 자료사진&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작년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뵌 적이 없었지만, 아들을 통해 말씀을 들은 정지석 목사님으로부터였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올해 국경선 평화학교라는 대안 대학을 비무장지대(DMZ) 안에 개설할 예정인데, 논어 강독을 4일 정도 해주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사실 이렇게 며칠 계속해서 집중적으로 해 본 경험이 없어서, 자칫 지루해지거나 재미없어지면 어떨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대학의 구성에 대한 관심, 특히 DMZ 안에서 평화학교를 운영하시려는 그 뜻에 동감해서 그렇게 해보겠다고 말씀드렸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한 참 후의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덧 시간이 되어 지난 5월 7일부터 10일까지 4일 동안 철원에 다녀왔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처음에 걱정했던 것과 달리 정말 재미있게 지내고 왔다. 정지석 목사님 부부의 따뜻한 환대와 이현아 간사, 한가선 간사 그리고 82세의 낸시 여사, 학생들(모두 여덟분이셨는데, 20대에서 50대에 이르는)과 저녁 시간에만 동참한 철원지역의 주민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철원도 처음이었지만, 민통선을 드나들면서, 또 소이산 정상에서 &amp;nbsp;철원평야와 그 너머의 북녘 땅을 바라보면서 평화를 생각하고 같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겐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082/176/%EC%9D%B4%EB%82%A8%EA%B3%A1dmz.jpg&quot; width=&quot;533&quot; height=&quot;400&quot; alt=&quot;이남곡dmz.jpg&quot; title=&quot;이남곡dmz.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특히 민통선 경계를 지나칠 때마다 보게 된 우리 병사들의 그 아름답고 순수한 모습들, 그 귀엽고 앳된 표정들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청년들을 참혹한 전쟁으로 이끌 수 있을까, 그것은 가장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너무 강하게 느껴져 왔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청년들의 해맑은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082/176/dmz%EC%B2%A0%EC%B1%85%EC%84%A0%ED%95%9C%EA%B2%A8%EB%A0%88%EC%8B%A0%EB%AC%B8.jpg&quot; width=&quot;290&quot; height=&quot;475&quot; alt=&quot;dmz철책선한겨레신문.jpg&quot; title=&quot;dmz철책선한겨레신문.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x; color: rgb(43, 40, 95);&quot;&gt;*비무장지대 철책선의 경비를 서는 군인들. 한겨레 자료사진&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논어 강독을 하면서 보다 새롭게 다가오는 구절들이 있었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절문이근사(切問而近思; 본질을 묻되, 구체적으로 탐구한다)라는 구절이 보다 선명하게 다가왔고, 전에 책을 쓸 당시, 따지고 보면 처음에 논어 강독을 할 때 들었던 지천명(知天命)에 대한 생각이 다르게 다가왔다.&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처음에는 지천명을 ‘진리를 깨달았다’는 뜻일 것이라고 읽혀졌는데(졸저 논어-사람을 사랑하는 기술에 그렇게 썼다), ‘무지(無知)’를 선언하면서 끝까지 탐구(好學)를 놓치지 않는 공자, 용지즉행 사지즉장(用之則行 舍之則藏; 쓰이면 행하고, 쓰이지 않으면 안으로 간직한다)을 이야기한 공자의 적극적 수동성을 생각할 때, 지천명(知天命)은 ‘자신의 소명 또는 자신의 분수’를 깨달았다라고 보는 편이 옳지 않을까 생각되었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특히 최근에 읽은 ‘소명은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의 진정한 기쁨과 세상의 깊은 허기가 만나는 지점’이라는 프레더릭 뷰크너의 이야기와 오버랩되면서 더 그런 쪽으로 생각이 된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공자야 말로 진정한 기쁨을 도(道)를 발견하고 그것을 실천하는데서 찾았던 분이기 때문이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여러 사람들과 함께 읽어가면서 새롭게 보여오는 세계가 열린다는 것이 고전을 함께 읽는 즐거움인 것 같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적어도 오랜 기간 공자나 논어의 영향을 받아온 아시아인들끼리라도 함께 논어를 통해 공자가 말하는 ‘인(仁)’이 생명과 평화를 신장시키는 길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그 시대를 초월한 지혜가 우리 시대-이 혼란스러워보이는 문명전환기에 한 줄기 빛으로 작용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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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신비주의에 대한 오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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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3-05-14T11:00:13+09:00</published>
      <updated>2013-05-14T23:55:03+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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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성해영</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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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align=&quot;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x&quot;&gt;2006년 알래스카에 나타난 오로라&amp;nbsp; 사진 AP통신&lt;/span&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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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gt;&lt;strong&gt;신비주의 개념의 등장&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lt;/strong&gt;&amp;nbsp;&lt;/p&gt;
&lt;p&gt;신비주의 개념은 어떻게 등장했을까?&lt;br /&gt;신비주의 개념의 유래와 함께 이 단어를 둘러싼 오해에 대해 얘기해 보자. 신비주의가 크게 ‘신비 체험, 체험을 위한 수행, 신비 사상’의 셋으로 나뉠 수 있다는 점은 이미 다룬 바 있다. 그리고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그 개념이 대단히 많은 의미를 내포하며, 동시에 오해의 소지 역시 적지 않다는 것 역시 언급했다. 그런데 개념의 성립 역사를 꼼꼼하게 살펴보면, 여러 가지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신비주의(mysticism)라는 개념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신비종교’(mystery cult)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미스테리(mystery)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무오’(muo), 즉 ‘눈이나 입을 가리다’라는 단어에서 왔다. ‘무오’는 곧 비밀 엄수를 의미한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다시 말해 비밀스러운 지식을 특징으로 하는 신비종교는 신중하게 입문자들을 골라 입문 의례를 행했으며, 입문자는 신비종교에서 배우게 되는 가르침이나 경험들을 외부인들에게 비밀로 지켜야만 했다. 실제로 비밀을 유지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의례를 비롯해 신비종교의 구체적인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는 오늘날에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비종교는 인간 영혼에 신적인 혹은 초월적 차원이 깃들여 있으며, 의식의 변형 상태를 유도해 이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된 내용으로 삼았다. 또 이러한 종교적 통찰이 인간 영혼의 ‘불멸성’과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점도 두드러진다. 이처럼 신비종교는 죽음, 재생, 불멸성 획득을 근간으로 삼았다. 그러니 초기 기독교가 근동의 신비종교로 간주된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삼일 만에 부활했다는 이야기는 그리스 신비종교의 주인공들인 오르페우스(Orpheus)나 디오니소스(Dionysus)가 겪은 &amp;lt;죽음-하계로의 여행-부활을 통한 불멸성 획득&amp;gt; 과정과 매우 흡사해 보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신비종교는 인간 의식을 의도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술을 비롯한 여러 가지 향정신성 약물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통음(痛飮)과 난장에 가까운 집회로 이름 높았던 디오니소스 축제가 대표적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그리스 로마의 신비종교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등장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한다. 특히 4세기 로마 황제였던 줄리앙(Julian the Apostate, 331-363)은 확장일로에 있던 기독교에 맞서 고대의 신비종교를 부흥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요절로 이런 시도는 실패에 그치고, 그리스 철학과 더불어 신비종교는 돌이킬 수 없는 쇠퇴의 길을 밟게 된다. 이후 16세기까지는 ‘신비적(mystical)’, ‘신비주의자(mystic)’와 같은 형용사와 명사가 기독교, 유대교의 신비주의를 지칭하기 위해 간헐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서구의 주요 종교는 신비주의자들을 회의적인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신비주의자들의 폭발적인 영성은 찬탄과 더불어 전통적인 교리를 위협하는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톨릭과 이슬람의 역사에서 탄압을 받았던 신비주의자들을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자신이 곧 신이라고 주장한 탓에 사형을 당했던 이슬람 신비주의자 알 할라지(Al-Hallaj, 858-922)나 이단으로 심판받아 십자가에서 화형을 당했던 마가리테 포르테(Marguerite Porete, ?-1310)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오랜 침묵의 시간을 거친 후 신비주의는 17세기에 이르러 화려하게 부활한다. 이 시기 유럽의 해외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서양인들은 동양 종교를 접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신비주의라는 명사가 동서양 종교 전통의 공통성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즉, 신비주의가 서로 다른 종교 이면에 존재하는 핵심이라는 이른바 ‘보편주의적’ 관점이 나타났던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 종교학이라는 학문을 새롭게 시작한 일군의 학자들을 필두로 서양의 지성인들과 유연한 태도를 지닌 종교인들이 이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신비적 합일 체험이 궁극적 실재에 대한 직접적인 앎을 주며, 이 비범한 앎을 시공간 속에서 독특하게 해석한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인 종교라 주장했다. 요컨대 신비주의는 영원불멸한 보편적 진리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는 입장이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동시에 신비주의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해진 유물론적 세계관에 맞서는 유일한 대항마로 부각되기도 했다. 과학 발달과 경제 성장의 원동력으로 자리 잡은 유물론적 세계관은 형이상학적이며 종교적 세계관을 대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이들을 압살하려 시도했다. 일군의 사람들은 유물론적 세계관에 반발해 인간 종교성의 뿌리를 개인적 체험에 기초한 신비주의에서 발견하고자 했다. 특히 개인의 종교 체험을 강조하는 신비주의는 당시 힘을 얻어가던 개인주의의 강조와도 일맥상통했기에 더욱 호응을 얻었다. 참된 종교성을 교리, 경전, 의례가 아닌 개인의 종교적 감정과 체험에서 찾았던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1768-1834)나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가 이 입장을 취했던 대표적인 사상가들이다.&amp;nbsp;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최근 일부 학자들은 20세기 전반기에 큰 인기를 끌었던 보편주의적 태도에 반발해 보편주의자들이 동일성을 찾겠다는 의욕에 경도된 나머지, 종교 전통이 가진 독특성과 차이를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들에 따르면 궁극적 실재의 체험이라는 것이 입증하기도 어렵거니와, 이 체험들을 상호 비교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게다가 여러 종교 전통은 궁극적 실재에 대해 이미 엄연히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공(空), 도(道), 신(神), 천(天) 등 각 종교가 주장하는 궁극적 차원이 같다고 어찌 단언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다. 게다가 서구라는 유신론적 배경에서 성립된 신비주의 개념을 문화적 맥락이 다른 동양에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무리일 뿐만 아니라, 자칫 비서구 사회에 대한 지적 폭력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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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align=&quot;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x&quot;&gt;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x&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align=&quot;center&quot;&gt;&amp;nbsp;&lt;/p&gt;
&lt;p align=&quot;center&quot;&gt;&amp;nbsp;&lt;/p&gt;
&lt;p align=&quot;center&quot;&gt;&amp;nbsp;&lt;/p&gt;
&lt;p align=&quot;center&quot;&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842/175/%EB%AF%B8%EC%BC%88%EB%9E%80%EC%A0%A4%EB%A1%9C%EC%9D%98%20%ED%94%BC%EC%97%90%ED%83%80-.jpg&quot; width=&quot;550&quot; height=&quot;576&quot; alt=&quot;미켈란젤로의 피에타-.jpg&quot; title=&quot;미켈란젤로의 피에타-.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p&gt;
&lt;p align=&quot;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x&quot;&gt;미켈란젤로의&amp;nbsp; 피에타상&lt;/span&gt;&lt;/p&gt;
&lt;p&gt;&lt;br /&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신비주의 개념을 둘러싼 오해들&lt;br /&gt;&lt;/strong&gt;&lt;/p&gt;
&lt;p&gt;이처럼 신비주의 개념이 성립된 역사를 되짚어 본 이유는 그 과정이 곧바로 이 단어를 둘러싼 여러 오해의 단초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오해들을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비밀주의와의 혼동 : ‘무오’라는 어원이 의미하듯 그리스의 신비종교와 그 뒤를 이은 여러 종교의 신비주의 전통은 의식 변형을 유발하는 수행법을 비롯해 체험을 통해 얻게 되는 통찰들을 비밀로 유지할 것을 엄격하게 요구했다. 그러니 이런 노력이 당연히 비밀주의와 연관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본래 신비주의가 강조하는 비밀 엄수의 의무는 신비적 통찰을 과장하거나 신비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비주의의 여러 내용이 체험자 개인에게나 주변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에, 보호틀을 확보한다는 의미를 강하게 띤 것이었다. 즉, 윤리적이며 지성적인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이 신비주의에 접할 때 생길 수 있는 여러 위험을 최소화하려는 의도에서 비밀주의는 불가피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유대교 신비주의인 카발라 전통이 입문자를 가정을 가진 불혹이 넘는 남성에서 찾았다는 것은 신비주의 전통의 조심성을 잘 보여준다. 그 점에서 연예인들의 대중 매체 기피를 신비주의로 일컫는 것은 우리나라 매스컴이 신비주의와 비밀주의를 혼동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단 혹은 나쁜 종교라는 오해 :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비종교가 쇠퇴하자, 서구 종교사에서 신비주의 역시 주변부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후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를 비롯한 많은 신비주의자들은 이단의 경계를 넘나들게 되었다. 특히 가장 논란이 되는 대목은 인간이 사후가 아닌 육체를 가진 동안에도 신과 하나가 됨으로써 신성을 체득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기독교가 사후에 가게 되는 ‘천국’을 종교 생활의 주된 목표로 제시했다면, 신비주의자들은 살아서 경험하는 내면의 천국 혹은 신과 하나 됨이라는 신비적 합일 상태를 종교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아울러 일부 신비주의자들은 예수를 인류의 구원자가 아닌 마치 깨달음을 얻은 붓다와 같은 모든 인간이 지향해야 하는 바람직한 패러다임으로 여기기도 했다. 이런 주장은 예수가 갖는 구원자로서의 신성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교리와 상충하기 쉬웠다. 게다가 동서양의 교류가 본격화된 이후에는 유신론적 서구 전통이 동양 종교의 자력적 경향을 폄하하기 위해 신비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했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비합리주의, 반-이성주의라는 오해 : 유물론적 세계관은 입증 가능성을 진리의 가장 중요한 판별 기준으로 제시하는 탓에 형이상학 혹은 종교적 세계관에 회의적인 입장을 취한다. 다시 말해 종교적 주장은 실증적으로 입증할 수 없기 때문에 객관적 진리로 받아들이기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궁극적 실재를 비롯해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을 강조하는 신비주의는 비합리적이거나 비이성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서양 철학을 시작한 피타고라스를 위시해, 플라톤, 플로티노스(Plotinus, 204-270)와 같은 철학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신비주의적이었는가를 고려해 본다면, 서구의 합리주의 전통을 신비주의에 반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곤란하다. 오히려 신비주의는 인간의 종교적 직관, 엑스터시 능력, 합리적 사색 능력 모두를 포괄하려는 시도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실제로 종교사에서 두각을 나타낸 신비주의자들은 개인의 성향에 따라 루미(Rumi, 1207-1273)와 같이 시적 감수성이 풍부한 신비주의자에서부터 플로티노스와 같은 철학적인 신비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넓은 스펙트&lt;/p&gt;
&lt;p&gt;럼을 보여준다. 요컨대 유물론 특히 자연과학의 실증주의적 합리성만을 인간 합리성의 전체라 간주하는 것은 성급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초자연주의와의 혼동 : 신비주의는 무엇보다 초자연주의와 혼동되기 쉽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신비주의는 분명 물질적 차원을 넘어선 초자연적 차원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다. 하지만 신비주의를 곧바로 초자연적 차원에 대한 믿음 체계라 간주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신비주의는 비물질적 차원이 드러나는 여러 계기들뿐만 아니라, ‘보이는 차원 vs 보이지 않는 차원’, ‘신 vs 인간’, ‘자연 vs 초자연’ 등과 같은 일체의 이원적 대립쌍을 초월하는 궁극적 실재의 체험을 그 핵심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계시, 채널링(channeling), 접신(possession), 샤머니즘, 유체이탈, 임사체험, 초능력, 기적, UFO 등과 같은 현상을 곧바로 신비주의라 일컫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신비주의가 궁극적 합일 체험을 정점으로 상술한 이원적인 경험들을 포괄할 수 있지만, 그 최종 지향점으로 이원성을 소거시키는 합일 체험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는다면 신비주의라 보기 어렵다. 그 점에서 샤머니즘을 비롯해 신과 인간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거리를 설정하는 종교는 신비주의가 아니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서양 중심주의라는 비난 : 신비주의 개념에 대한 동양적 편견 역시 존재한다. 이 개념이 애초에 서양의 유신론적 배경에서 비롯된 탓에 동양의 종교성을 제대로 포착하기 힘들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 견해 역시 나름 타당성을 갖지만, 이러한 주장 이면에 내재한 동양 종교의 우월성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유신론적 종교가 동양의 무신론적 종교보다 우월하다는 서구의 주장을 쉽사리 수용하기 힘들지만, 반대로 무신론적 동양 종교가 유신론적 종교보다 우위라는 입장 역시 입증하기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신비주의라는 개념이 서양에서 유래한 것은 맞지만, 동서양에는 초월적 체험을 목표로 삼는 종교가 분명히 있는데다, 이런 흐름을 신비주의라 지칭하는 것이 곧바로 동양 종교를 폄하하는 태도라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동서양 종교의 독특성을 간과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놓치기 힘든 유사성에 주목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더구나 동서양의 교류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해진 오늘날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신비주의가 애초부터 비교를 위해 등장한 개념이며, 실상 ‘신비주의’라는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개념을 동양 종교를 폄하하는 개념으로 간주하는 것은 성급하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align=&quot;center&quot;&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842/175/%EC%B0%B8%EC%84%A0-.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00&quot; alt=&quot;참선-.jpg&quot; title=&quot;참선-.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p&gt;
&lt;p align=&quot;center&quot;&gt;&amp;nbsp;&lt;/p&gt;
&lt;p align=&quot;center&quot;&gt;&amp;nbsp;&lt;/p&gt;
&lt;p align=&quot;center&quot;&gt;&amp;nbsp;&lt;/p&gt;
&lt;p align=&quot;center&quot;&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842/175/%EC%98%88%EC%88%98%EC%9B%90%EC%9D%98%20%EA%B8%B0%EB%8F%84-.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430&quot; alt=&quot;예수원의 기도-.jpg&quot; title=&quot;예수원의 기도-.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p&gt;
&lt;p align=&quot;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x&quot;&gt;예수원의 기도&lt;/span&gt;&lt;/p&gt;
&lt;p&gt;&lt;br /&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도대체 신비주의자들은 누구인가?&lt;br /&gt;&lt;/strong&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런 숱한 오해에도 불구하고 신비주의라는 단어는 여전히 유효할까? 그런데 오히려 이런 오해는 이 개념을 더욱 생명력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닐까. 즉, 오랜 세월 동안 켜켜이 쌓여 온 오해와 논란이 도리어 신비주의의 힘이 아닐까.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무엇보다 신비주의라는 단어는 사용하는 사람의 세계관을 곧장 드러낸다. 그 점에서 신비주의는 우리를 비추어 보는 거울과 같다. 예컨대 신비주의를 비합리주의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유물론적 세계관을 신봉하는 사람일 것이다. 만약 신비주의를 이단 종교와 동일시하는 사람은 비신비주의적 종교 전통을 정통으로 여기는 사람이리라. 이런 판단이 가능한 이유는 신비주의 개념이 모든 오해의 가능성을 이미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차원과 보이지 않는 차원의 관계를 비롯해, 인간이 참된 본성이 무엇인지, 어떤 종류의 앎이 왜 비밀로 지켜져야 하는지,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존재의 궁극적 본성을 알아차릴 수 있는지에 이르기까지 신비주의는 이 모든 것들을 망라하고 있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니 신비주의라는 단어는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신비주의자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주장에 귀 기울여야 한다. 다시 말해 개념의 모호성은 신비주의자들의 목소리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해소될 수 있다. 실제로 종교사에서 신비주의라고 불리는 종교 전통은 존재한 적이 없었지만, 신비주의자들은 적지 않게 있었고, 신비주의자라는 단어가 신비주의보다 훨씬 오래 전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렇다면 신비주의자(mystic)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들은 무엇을 원했던 사람들인가? 신비주의자들은 인간의 본성 혹은 존재의 궁극적 본성을 직접 체험하고자 시도했던 사람들이다. 각고의 수행 끝에 혹은 신의 은총에 힘입어 이원성이 사라진 합일의 체험을 경험했고, 그리고 그 체험을 공유하기 위해 영감에 찬 시어(詩語)를 비롯해 사변적인 철학 용어, 심지어 침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사소통의 방식을 실험했던 사람들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 점에서 신비주의자들은 뭔가 있어 보이기 위해 타인들을 기피하거나 비밀을 가졌다고 자랑했던 사람들이 아니었고, 죽은 사람들의 영혼과 접촉하거나,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삶의 주된 목적으로 삼았던 사람들도 아니었다. 혹은 자신이 믿었던 종교가 유일한 진리라 주장했던 사람들도 아니었고, 인간 합리성의 한계를 지적하기는 했어도 이성을 배척한 비합리주의자들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때때로 그들은 체험이 가르쳐 준 바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종교 전통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심지어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요컨대 신비주의자들은 궁극적 목표인 초월의 체험을 갖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고, 이 과정에서 찬탄과 오해를 함께 받았던 사람들이다.&amp;nbsp;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신비주의자들은 머나먼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존재한다. 또 신비주의자들은 공간을 초월해 존재한다. 그러니 신비주의자들을 갖지 않는 나라는 없다. 그리고 신비주의자들은 종교 안에서도 심지어 종교 밖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종교와 신비주의는 일치하는 개념이 아니다. 신비주의자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곧 궁극적 실재의 일부라고 말하면서 모든 이원적 분리의 관념을 허물어 버린다. 성별, 지식의 유무, 세속적 권력의 소유, 믿음 체계 등 여하한 구별과 차별을 철저하게 폐기시킨다. 그리고 가끔은 자신이 속한 종교 전통 자체도 소거시키기에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신비주의에 내포된 이러한 급진성은 다름 아닌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 체험에서 비롯된다. 신비적 합일 체험은 한편으로 ‘중심 없는 중심’으로 기능하는 탓에 무한한 해방의 근원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숱한 비난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는 자유와 해방의 씨앗이자, 동시에 불화와 불편함의 원천이다. 즉, 신비주의는 밝은 빛과 더불어 그에 비례한 어두움을 갖는다. 그러니 이 대목에서 신비주의가 인간들에게 극도의 조심스러움을 요구한다는 신비주의자들의 주장을 새삼 기억할 필요가 있다. &lt;/p&gt;
&lt;p&gt;&lt;br /&gt;&amp;nbsp;&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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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알렉산드로스와 싯다르타, 예수의 차이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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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3-05-13T11:12:46+09:00</published>
      <updated>2013-05-14T13:20:47+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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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휴심정</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lt;br /&gt;&lt;/b&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절대권력 VS 욕망을 버리고 얻은 진리&lt;/b&gt;&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마케도니아 버스터미널에서 올림포스 산을 향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버스가 지나는 길을 따라 올림포스 산의 신전에 갔다.&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테살로니키에서 올림포스 산이 있는 리토호로 시에 이르는 한두 시간 내내 설산이 보인다. 그리스에서 아토스 산이나 올림포스 산만 설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그리스에선 여름을 빼면 어디서고 설산을 쉽게 볼 수 있다.&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설산의 긴 줄기가 고타마 싯다르타의 고향인 카필라 성 인근의 히말라야 설산을 연상케 할 만큼 장대하다. 설산을 보니 알렉산드로스와 고타마 싯다르타의 삶이 쌍두마차처럼 연계돼 그려진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두 사람 모두 왕자로 태어났지만 한 명은 욕망으로 현세를 장악한 대왕이 되었고, 다른 한 명은 욕망을 버리고 정신세계의 상징이 되었다. “제우스의 아들로 점지됐다”고 한 알렉산드로스의 탄생 이야기와 비슷하게 싯다르타는 히말라야의 아시타 선인으로부터 “속세에 살면 세상을 다스리는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출가하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것이다”는 예언을 듣는다.&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런데 어린 시절의 교육이 두 사람을 전혀 다른 길로 이끈다.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립포스 왕은 알렉산드로스를 당대 최고의 스승에게 맡겨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대왕’으로 길렀다. 반면 고타마 싯다르타의 부친 숫도다나 왕은 선인의 예언처럼 혹시나 아들이 궁궐을 떠나 출가할까 두려워했기에 세상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향락으로 포위했다. 태자 싯다르타가 계절마다 다른 궁전에서 지내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젊은 여인들 품속에서 환락에 빠져 세상 고통을 맛보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466/175/3%EC%9D%B8%ED%95%A9%EC%B2%B4.jpg&quot; width=&quot;447&quot; height=&quot;442&quot; alt=&quot;3인합체.jpg&quot; title=&quot;3인합체.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
&lt;/span&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모든 향락을 끊고 철저히 절제의 삶을 익힌 알렉산드로스는 그 훈련의 힘으로 세계를 제패했다. 반면 싯다르타는 십대 후반 우연히 성 밖에서 병들어 죽어가는 삶의 고통을 목격한 뒤, 삶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이어 오랜 고뇌 끝에 스물아홉 살에 늦깎이로 출가를 결행한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세속적으로 볼 때 알렉산드로스는 고국 마케도니아뿐 아니라 그리스의 영광을 세상에 드날린 인물이다. 반면에 싯다르타는 고국인 카필라 왕국과 동족인 석가 족에겐 무력하기 그지없는 존재다. 싯다르타의 고국인 카필라 왕국은 코살라국의 비유리 왕에게 멸망한다. 원한 때문이었다. 비유리의 어머니는 석가 족 공주의 몸종이었다. 카필라국은 공주를 코살라국에 시집보내기 싫어 공주의 몸종을 그 나라로 보낸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비유리는 태자 시절 외갓집이라고 찾아간 카필라성에서 석가족으로부터 어머니의 신분을 알게 되고, 평생 잊지 못할 수모를 당한다. 그래서 훗날 석가족의 씨를 말리겠다는 결심을 한다. 비유리 왕이 군사를 일으켜 석가족을 치러 나서자, 싯다르타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비유리 왕이 지나가는 길목을 세 차례나 지켜서 그가 돌아가게 한다. 그러나 네 번째에 이르러서는 카필라국이 치러야 할 인과응보임을 알고 이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동족들이 비유리 왕이 이끄는 군사들의 칼에 죽어가고, 왕국이 멸망하는 모습을 지켜본다.&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알렉산드로스보다 300여 년 뒤 인물인 예수도 싯다르타처럼 조국 이스라엘에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예수는 알렉산드로스처럼 서른세 살이란 젊은 나이에 죽는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그 나이에 조국의 깃발을 세상에 꽂은 것과 전혀 달랐다. 예수를 ‘유대의 왕’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그가 놀라운 권능을 발휘해 로마의 압제로부터 유대를 해방시켜 줄 것이라 믿었다. 예수가 로마 군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조차도 그가 기적을 일으켜 로마 군을 무찌르고 새 세상을 열어주기를 열망했다. 구약시대부터 이집트에 노예로 끌려가 모세를 따라 해방을 꿈꾸며 가나안 땅을 찾아왔던 히브리(유대)인들에겐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주는 사람이 구세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예수는 모든 기대를 저버린 채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숨지고 만다. 그를 철석같이 믿었던 이들은 절망에 빠지고 만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런데 현세적 욕망을 이룬 알렉산드로스의 빛이 그의 사망과 동시에 산산이 흩어진 것과 달리 당대엔 무력했던 싯다르타와 예수의 빛이 2천년 넘게 찬란히 비추고 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6px; color: rgb(0, 117, 200);&quot;&gt;&amp;lt;그리스인생학교&amp;gt;(조현 지음, 휴) &apos;3장 알렉산드로스의 기도 신전, 디온&apos; 중에서&lt;/span&gt;&lt;/b&gt;&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content>
                  <category term="알렉산드로스"/>
            <category term="올림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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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term="고타마 싯다르타"/>
            <category term="필립포스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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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term="예수"/>
            <category term="그리스인생학교"/>
            <category term="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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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지상낙원이 바로 여기라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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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3-05-13T10:55:09+09:00</published>
      <updated>2013-05-14T21:14:52+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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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휴심정</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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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div&gt;&lt;br /&gt;&lt;/div&gt;
&lt;div&gt;바다로 잠수하는 일몰의 향연에 취해 있는데 저녁 8시가 되자 예배를 알리는 종이 울린다. 정교회 수도원의 예배당은 전기를 사용하지 않고 촛불만 켜서 어둡다. 불빛이 성서만을 비추고 외부에는 새지 않도록 차단한 것을 보면 내부 공간을 최대한 어둡게 하려는 것 같다. 어둠은 고요함 속에서 마음의 눈을 뜨게 해준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단순한 찬양이 몇 시간 동안 반복되다가 드디어 화려한 제사 복을 입은 제사장이 등장한다. 그제야 노 수도사들이 제사장을 둘러싸고 식을 진행한다. 제사장과 원로가 드나드는 제사 구역은 마치 사당 같다. 언뜻 그 안에 성모 마리아의 성화가 보인다. 성모 마리아의 호칭을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뜻의 ‘테오토코스’로 한 정교회다운 공경이 느껴진다.&lt;/div&gt;
&lt;div&gt;&lt;br /&gt;&lt;/div&gt;
&lt;div&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443/175/IMG_5321_1.JPG&quot; width=&quot;546&quot; height=&quot;376&quot; alt=&quot;IMG_5321.JPG&quot; title=&quot;IMG_5321.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br /&gt;&lt;/div&gt;
&lt;div&gt;&lt;br /&gt;&lt;/div&gt;
&lt;div&gt;제사 구역에서 예배당 밖으로 나온 제사장은 조그만 화로 같은 것을 줄로 매달아 손으로 들고 다니며 마치 고무줄놀이를 하듯이 사람들 앞에서 털털 턴다. 그러면 그곳에서 불이 쏟아진다. 액막이 같은 정화 의식인 모양이다. 제사장 주관으로 성체 의식이 진행된다. 제사장이 한 명 한 명 각자의 입에 뭔가를 떠 넣어준다.&amp;nbsp;&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입에 푹 넣어주는 스푼은 하나뿐이다. 그러나 아무도 다른 사람 입에 들어간 스푼이 자기 입으로 다시 들어오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아주 감격스런 표정이다. 그렇게 제사장이 준 성체를 받아먹은 사람은 다시 큰 접시에 놓인 음식을 하나씩 집어서 입에 넣는다. 이런 제사의식과 낭송과 찬송은 밤이 깊어지면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든다.&lt;/div&gt;
&lt;div&gt;&lt;br /&gt;&lt;/div&gt;
&lt;div&gt;밤이 깊어지자 숙소에서 잠을 청하고자 했지만 쉽게 잠을 잘 수가 없다. 창가로 새어 드는 달빛이 너무 밝아서인지, 아니면 수도사들이 끊임없이 되뇌는 챈팅이 마음속에서 울려 퍼져서인지 알 수 없다. 숙소를 열 명 가량이 함께 쓰고 있어서 밤새 예배당과 숙소를 왔다 갔다 하는 순례객들로 인해 깊은 잠에 빠지기는 더욱 어렵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그러다 설핏 잠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천상의 소리인 듯 아름다운 음악이 들린다. 아주 가깝게 들린다. 수도사들이 부르는 노래일까. 잠시 뒤 옆 침대에서 누군가 일어난다. 그의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알람 소리다. 지금 예배당에서 울려 퍼지는 챈팅과 똑같은 그리스정교회 성가다. 시간을 보니 새벽 2시 반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화장실도 갈 겸 마당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어쩔 뻔 했는가. 둥근 보름달 주위로는 오색 채운이 감돈다. 바다는 달빛을 마음껏 머금고 남아 대자연에 되돌려주고 있다. 달빛잔치다.&amp;nbsp;&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예배당에서 새어 나오는 찬송은 자장가처럼 마음을 파고든다. 침묵 속엔 시간이 없다. 얼마나 지났을까. 예배당에서 밤을 샌 노 수도사들이 나오고 있다.&amp;nbsp;&lt;/div&gt;
&lt;div&gt;&lt;br /&gt;&lt;/div&gt;
&lt;div&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443/175/%EC%95%84%ED%86%A0%EC%8A%A417.JPG&quot; width=&quot;376&quot; height=&quot;546&quot; alt=&quot;아토스17.JPG&quot; title=&quot;아토스17.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br /&gt;&lt;/div&gt;
&lt;div&gt;&lt;br /&gt;&lt;/div&gt;
&lt;div&gt;우리는 영적인 경험을 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적 경험을 하는 영적인 존재라고 했던가.　키도 생김새도 제 각각인 그들이 하나같이 환한 달을 품고 있다. 동양 현자의 노래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한 축가였으리라.&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마음 쉴 때면 문득 달 떠오르고 바람 불어오니, 이 세상 반드시 고해는 아니네.’　&lt;/div&gt;
&lt;div&gt;&lt;br /&gt;&lt;/div&gt;
&lt;div&gt;&lt;br /&gt;&lt;/div&gt;
&lt;div&gt;
&lt;table style=&quot;BACKGROUND: #cccccc&quot; cellspacing=&quot;1&quot;&gt;
&lt;tbody&gt;
&lt;tr style=&quot;BACKGROUND: #ffffff&quot;&gt;
&lt;td&gt;
&lt;p&gt;&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lt;/p&gt;
&lt;p&gt;&lt;/p&gt;
&lt;div&gt;수도의 기원 &amp;nbsp;&lt;/div&gt;
&lt;div&gt;&lt;br /&gt;&lt;/div&gt;
&lt;div&gt;&lt;br /&gt;&lt;/div&gt;
&lt;div&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443/175/%EC%95%84%ED%86%A0%EC%8A%A416.JPG&quot; width=&quot;376&quot; height=&quot;546&quot; alt=&quot;아토스16.JPG&quot; title=&quot;아토스16.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br /&gt;&lt;/div&gt;
&lt;div&gt;&lt;br /&gt;&lt;/div&gt;
&lt;div&gt;수도생활은 인류 ‘정신’의 탄생 때부터 시작됐을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이 &amp;nbsp;현실적 고통을 넘어서 초월적 평화에 이르고자 하는 갈망을 갖고 이를 실천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그 길을 안내해줄 신과 진리를 찾는다.&amp;nbsp;&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진리와 신으로 이르는 길은 각양각색이다. 그리스 올림포스 신화나 히브리 유일신 야훼에겐 절대복종이 최선의 방법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고대 오르페우스종교가 신앙했던 디오니소스신앙은 ‘수도’의 방법을 열었다.&amp;nbsp;&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지하 세계의 여왕인 페르세포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제우스는 디오니소스가 너무 사랑스러워 자신의 뒤를 이어 세상을 다스릴 후계자로 내정한다. 그러나 질투의 화신 제우스의 부인 헤라는 아이를 죽이려 티탄을 보낸다. 티탄은 아기를 죽여 사지를 몽땅 잘라 삼켜버렸다. 디오시오스 찬가에선 제우스가 티탄들을 번개로 내리치자 재가 됐다고 한다. 그 재에서 인간이 태어났다고 한다. 이는 인간은 티탄적인 원죄와 디오니소스적 신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는 원죄설의 기원이 된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오르페우스 종교는 피타고라스-플라톤-피타고라스학파-신플라톤주의-기독교로 그 맥이 이어진다. 플라톤은 ‘인간의 사명’을 “자기 영혼이 지니고 있는 신적인 요소를 발견하고, 이를 신과 재결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또 다른 전승은 디오니소스가 재가 됐을 때 아테나가 심장만은 구해내 아버지 제우스에게 보내주었다. 제우스는 이를 꿀꺽 삼킨 뒤, 제2의 디오니소스를 낳았다. 디오니소스는 죽지않는다는 신인데도 죽었고, 다시 부활했다. 디오니소스의 상징은 포도다. 늘 그의 조각상엔 포도넝쿨이 있다. 그래서 포도주는 불멸과 부활의 상징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오르페우스 교리에선 영혼은 죽은 뒤 지하세계로 내려가 신의 심판을 받는다. &amp;nbsp;이들은 영혼 윤회설을 주장한다. 육신을 방랑하던 영혼은 죄를 씻고 정화(katharsis) 되어 순수해져야 윤회에서 해방된다는 것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오르페우스의 제자이자 아들인 무사이오스에 의해 창시된 엘레우시스 신비의식은 죽음을 안전하게 건너는 방법을 안내해준다. 《이집트 사자의 서》나 《티베트 사자의 서》와 같은 류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그러나 예수 탄생 5세기 전에 청교도적 삶을 제시한 플라톤이 내놓은 더 혁신적인 방식은 욕망과 쾌락을 절제하는 금욕적 삶과 함께 정신적인 훈련을 통해서 영혼이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철학은 죽음에의 연습”이라고 했다. 수도도 육신의 욕망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훈련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따라서 삶에서 선악의 행위, 그리고 얼마나 수도를 했느냐에 따라 사후의 삶이 결정된다고 한다. 결국 &amp;nbsp;살아서도 죽어서도 자신의 삶은 자신이 선택한다는 것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예수는 사막에서 40일간 금식기도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기고 승리한다. 예수의 공생애도 이 수도로 시작된다. 그는 십자가 고난을 거쳐 ‘신적인 그리스도’로 부활한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이어 3세기 후반 이집트 테베에서 안토니우스(251? ~ 356?)가 20년간 홀로 수도하는 것으로 수도만으로 살아가는 수도승이 역사에 등장한다. 이어 4세기 베네딕도 수도원 운동을 통해 수도의 삶이 널리 확산된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수도승을 뜻하는 ‘모나코스(monachos)’는 그리스어 어근 ‘하나(monos)’에서 왔다. 수도는 이 세상적 욕망에서 벗어나 우리의 본래의 순수한 영혼으로 귀일하는 여정이다.&lt;/div&gt;
&lt;div&gt;&lt;br /&gt;&lt;/div&gt;
&lt;p&gt;&lt;/p&gt;
&lt;p&gt;&amp;nbsp;&lt;/p&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 /&gt;&lt;/div&gt;
&lt;div&gt;&lt;br /&gt;&lt;/div&gt;
&lt;div&gt;&lt;br /&gt;&lt;/div&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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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term="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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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term="수도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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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혜윤의 &lt;사생활의 천재들&gt;</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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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3-05-13T10:32:56+09:00</published>
      <updated>2013-05-17T10:32:12+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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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align=&quot;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419/175/%EC%82%AC%EC%83%9D%ED%99%9C%EC%9D%98%20%EC%B2%9C%EC%9E%AC%EB%93%A4%20%ED%91%9C%EC%A7%80-.jpg&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598&quot; alt=&quot;사생활의 천재들 표지-.jpg&quot; title=&quot;사생활의 천재들 표지-.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 저에겐 통영 가마솥 시래깃국 식당이 있습니다. 그 식당은 2.5평 남짓으로 비좁습니다. 시래깃국 값은 4천 원입니다. 그 식당엔 손님이 끊이질 않습니다. ... 그런데 이 식당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2인용이나 4인용 식탁들이 없다는 점입니다. 고기 상자였던 합판을 이어 붙여 만든 기다란 식탁이 하나 놓여있을 뿐입니다.&amp;nbsp;&lt;/span&gt;&lt;/p&gt;
&lt;p&gt;&lt;br /&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quot;우리 식당은 23년이 되었어요... 우리 식당은 평등한 곳입니다. 시장이든 판사든 내겐 막노동꾼과 똑같은 4천 원짜리 손님입니다. 밥값이 싸니까 먼저 온 사람은 뒤에 온 사람 밥값을 내줄 수 있습니다. 그럼 밥을 얻어먹은 사람은 뒷사람 것을 내줍니다. 저는 그렇게 앞사람이 뒷사람 밥값을 내주는 것이 연달아 일곱 차례까지 이어지는 것을 봤습니다. ... 토요일 일요일 가게 밖에서 기다리는 손님이 있으면 마지막 숟가락을 서서 입에 털어 넣으면서 &apos;여기 앉으세요&apos;하고 먼저 권하는 것이 우리 손님들입니다. 그릇도 설거지통에 갖다 넣기도 합니다. 가게가 좁으니까요. 인생 별거 아닙니다. 밥상에서 자리 자기를 조금 좁혀서 같이 앉는 겁니다. ...&quot;&lt;/span&gt;&lt;/p&gt;
&lt;p&gt;&lt;br /&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래요. 이것 또한 &apos;사소하지만 영원한 의미를 지닌 방식&apos;으로 서로 신경을 써주는 거죠. 그런데 저는 통영 아주머니 말을 듣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시대에 태어나 같은 땅에서 살고 있단 점에서 이미 아주 커다란 한 식탁에 앉아있는 셈이라고요. 우린 옆에 같이 앉아 밥을 먹는 사이인거죠.&lt;/span&gt;&lt;/p&gt;
&lt;p&gt;&lt;br /&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장소의 진실성에 대해선 이렇게 우린 몇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소 말고 사람이 서식지인 경우에 대해서는 더 섬세한 관찰력을 가져야만 합니다. &apos;사소하지만 영원한 의미를 지닌 방식으로&apos; 서로 파괴를 하는 것에 대해서 제가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단테의 &amp;lt;신곡&amp;gt; &apos;지옥&apos; 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지옥에 들어가는 자가 입구에서 맞닥뜨리는 구절입니다.&amp;nbsp;&lt;/span&gt;&lt;/p&gt;
&lt;p&gt;&lt;b&gt;&lt;br /&gt;&lt;/b&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 COLOR: rgb(255,0,0)&quot;&gt;&lt;b&gt;&lt;span style=&quot;COLOR: rgb(239,0,124)&quot;&gt;비통의 도시로 가려는 자 나를 거쳐서 가라&lt;/span&gt;&lt;/b&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 COLOR: rgb(255,0,0)&quot;&gt;&lt;b&gt;&lt;span style=&quot;COLOR: rgb(239,0,124)&quot;&gt;영원한 고통을 당하려는 자 나를 거쳐서 가라&lt;/span&gt;&lt;/b&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 COLOR: rgb(255,0,0)&quot;&gt;&lt;b&gt;&lt;span style=&quot;COLOR: rgb(239,0,124)&quot;&gt;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lt;/span&gt;&lt;/b&gt;&lt;/span&gt;&lt;/p&gt;
&lt;p&gt;&lt;br /&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저는 처음에 이 구절을 읽었을 때는 지옥은 희망이 없는 곳, 절망만 가득한 곳이란 뜻으로 이해했었습니다. 그다음에 읽었을 때는 희망을 버리면 이 세상도 지옥이된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다시 읽었을 때는 &apos;나&apos;가 정말 &apos;나&apos;로 읽혔습니다. 나를 거쳐 가는 자가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된다면, 나를 거쳐 가는 자가 모든 희망을 버리게 된다면, 내가 누군가에게 지옥인 것입니다. 내가 타인의 지옥인 것입니다.&amp;nbsp;&lt;/span&gt;&lt;/p&gt;
&lt;p&gt;&lt;br /&gt;&lt;/p&gt;
&lt;p&gt;&lt;b&gt;&lt;span style=&quot;COLOR: rgb(120,32,185); FONT-SIZE: 16px&quot;&gt;&amp;lt;사생활의 천재들&amp;gt;(정혜윤 지음, 봄아필) &apos;인간의 서식지에 대하여-김산하(야생영장류학자)와 함께&apos; 중에서&amp;nbsp;&lt;/span&gt;&lt;/b&gt;&lt;/p&gt;&lt;/div&gt;</content>
                  <category term="정혜윤 피디"/>
            <category term="사생활의 천재들"/>
            <category term="단테"/>
            <category term="신곡"/>
            <category term="지옥편"/>
            <category term="김산하"/>
            <category term="야생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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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석종의 고승열전 &lt;마음 살림&gt;</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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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3-05-12T23:02:53+09:00</published>
      <updated>2013-05-13T16:24:00+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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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휴심정</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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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102/175/%EC%84%B1%EC%88%98%EC%8A%A4%EB%8B%98%EA%B2%BD%ED%96%A5%EC%8B%A0%EB%AC%B8.jpg&quot; width=&quot;495&quot; height=&quot;313&quot; alt=&quot;성수스님경향신문.jpg&quot; title=&quot;성수스님경향신문.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lt;/p&gt;
&lt;p&gt;&lt;br /&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오래전 서울 태평로 삼성주식회사(삼성그룹) 사옥에 한 스님이 찾아왔다. 이병철 회장을 만나겠다며 막무가내로 버텼다. 퇴근 시간이 다된 이 회장이 할 수 없이 문을 열어줬다.&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quot;스님이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십니까?&quo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quot;우리나라에서 돈이 제일 많은 회장님께 돈 버는 비결을 배우고 싶어서 왔소. 내가 그 비결을 좀 배워서 모든 중생을 잘살게 하려고 합니다.&quo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quot;하하하하.... 그래요?&quo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평소 잘 웃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이 회장이 기분 좋게 웃었다.&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이 회장은 스님에게 저녁 식사까지 대접했다.&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나중에 스님이 말했다.&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quot;이 회장 돈 버는 비결은 도둑놈을 사람 만들어 쓰는 재주더군.&quo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평소 남다른 기행과 거침없는 언행, 혹독한 수행으로 살았던 성수 스님 이야기다. 스님은 &quot;이병철 회장을 만나서 도둑놈 사람 만드는 재주나 중생을 구제하는 불교의 진리나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알게 됐다&quot;고 했다.&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span&gt;&lt;/p&gt;
&lt;p&gt;&lt;br /&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quot;내가 오도독 오도독 재미나는 인생을 갈쳐주까? 매일 아침 첫 마디는 남을 상처 주는 &apos;송곳 말&apos;하지 말고 좋은 말로 시작해야 하는 거요. 몸을 움직일 때는 태산처럼 무겁게 걸어야 해. 또 하루 중에 단 5분이라도 부처님 흉내를 내서 앉아 있었봐. 그래서 있는 복이라도 잘 관리하고 잘 쓰면 사는 재미가 나는 거지.&quo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사람들의 말이 험하고 자세가 바르지 못하니 개인의 몸과 마음이 아프고, 사회가 병들고, 정치가 어지럽다고 했다.&amp;nbsp;&lt;/span&gt;&lt;/p&gt;
&lt;p&gt;&lt;br /&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성수 스님은 항상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독창적인 법문을 했다. 불교의 불살생(不殺生) 계율에 대해서도 독특하게 풀이했다.&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quot;생명을 죽이지 마라는 뜻이 다가 아녀. 죽지 마라, 즉 생사의 윤회에서 빠져나오라는 풀이가 부처님의 말씀에 더 가깝다고. 사람들이 파리 한 마리 죽이는 것은 마음 아파 하지만 매일 제 목숨 죽는 것을 모르잖아. 제 목숨을 죽이지 마라, 그게 불살생이란 말여. 옛말에 대인(大人)은 자기 걱정에 여념이 없고 소인은 남의 일만 걱정한다 했어.&quo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스님은 이것만은 잊어서는 안 된다며 &quot;헛말 하지 말고, 헛일 하지 말고, 헛걸음 하지 마라. 남 탓 하지 말고, 나를 탓해라&quot;고 여러 차례 당부했다.&amp;nbsp;&lt;/span&gt;&lt;/p&gt;
&lt;p&gt;&lt;br /&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스님은 &apos;이 뭣꼬&apos;, &apos;똥막대기&apos; 같은 전통적인 화두를 내려주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이 화두고 선이다. 각자 자기에게 가장 절실한 것, 그리고 죽고 사는 근본적인 문제가 화두라고 했다.&amp;nbsp;&lt;/span&gt;&lt;/p&gt;
&lt;p&gt;&lt;br /&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quot;마음에 부딪치는 모든 것, 나를 괴롭히는 일들을 모두 고마운 문수보살로 만들어야 하지. 자연은 때를 아는데 인간은 그러지를 못해. 자연을 봐. 날 때 나고, 클 때 크고, 꽃필 때 꽃피고, 열매 맺을 때 열매 맺고, 마침내 익어서 결실을 보잖아. 우리 인간은 예순 살이 돼도 익을 줄 모르기 때문에 늙어 썩어지고 버림받는 거라고.&quot;&lt;/span&gt;&lt;/p&gt;
&lt;p&gt;&lt;br /&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평생 &apos;괴각승(괴짜스님)&apos;을 자처하며 한바탕 당당하고 멋지게 살았던 &apos;황석산 대쪽&apos; 성수 스님은 2012년 4월15일 양산 통도사 관음암에서 열반의 길로 갔다. 세수 아흔 살, 출가 69년째였다.&amp;nbsp;&lt;/span&gt;&lt;/p&gt;
&lt;p&gt;&lt;br /&gt;&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 rgb(120,32,185)&quot;&gt;&lt;b&gt;&amp;lt;마음살림 - 큰스님 27인이 전하는 마음을 살리는 지혜&amp;gt;&amp;nbsp;&lt;/b&gt;(김석종 지음, 위즈덤경향&amp;gt; 중에서&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 rgb(120,32,185)&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 rgb(120,32,185)&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gt;&lt;/p&gt;&lt;/div&gt;</content>
                  <category term="성수 스님"/>
            <category term="이병철 회장"/>
            <category term="삼성"/>
            <category term="김석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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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애욕, 가장 끊기 어려운 욕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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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3-05-12T22:21:51+09:00</published>
      <updated>2013-05-12T22:21:51+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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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휴심정</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인간이란 얼마나 이상한 존재인가. 누군가는 욕망을 키우고 키워 하늘까지 바벨탑을 쌓으려 하는데 이와는 반대로 누군가는 세속적 욕망을 포기한 채 자신을 비우고 또 비워낸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018/175/IMG_4747.JPG&quot; width=&quot;369&quot; height=&quot;546&quot; alt=&quot;IMG_4747.JPG&quot; title=&quot;IMG_4747.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인간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수면욕, 식욕, 색욕 가운데 이곳에서 가장 채워지기 어려운 욕망이 색욕이다. 그래서 금녀국인 아토스 산 수도사들은 어느 종교, 어느 수도회보다 ‘마귀와의 투쟁’을 강조한다. 마귀란 다름 아닌 음욕이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플라톤이 쓴 《향연》에 따르면 애초 지상엔 남자와 여자 그리고 남녀가 함께 붙은 양성체 인간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양성체 인간들의 정신과 신체적 능력이 신 못지않았다. 그래서 신은 위협을 느끼고 시샘해 반쪽으로 갈라버린다.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그리움으로 생을 허비해서 무력해지도록.&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러나 잃어버린 반쪽을 찾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신화에서도 인간은 반쪽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해 점차 더 큰 사랑으로 이어져 진정한 아름다움과 선, 정의, 자유, 행복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간다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발견해 사랑하는 것이 성숙의 과정인 것처럼.&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하지만 성을 집착의 근원으로, 지고한 정신으로 향하는 최대의 걸림돌로 보는 독신 수도자의 세계는 이와 다르다. 아토스 산은 외적인 집착을 끊고 내면에만 집중해 신성을 밝히는 수도처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렇지만 세속적인 삶이 아닌 출세간의 삶을 선택했다고 해서 곧 바로 초연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냉정한 판단에 의한 자발적인 선택으로 결행한 출가가 아닌 경우도 숱하다. 만약 수도자가 이성이나 사업, 인간에 대해 환멸이나 좌절, 상처 때문에 도피했다면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수도복을 죄수복처럼 답답해하며 더 고통스러워할 수도 있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도피로 수도를 선택한 이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자발적으로 선택한 자에게도 본능을 극복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018/175/IMG_4530.JPG&quot; width=&quot;369&quot; height=&quot;546&quot; alt=&quot;IMG_4530.JPG&quot; title=&quot;IMG_4530.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사랑의 불길에 마음을 태워 없애버리고 싶을 만큼 여인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이 불타올랐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수도원과 수도사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베네딕토 성인조차 욕정에 사로잡혀 들뜬 적이 있다며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제2의 그리스도로까지 존경 받는 프란체스코 성인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욕정을 이기기 위해 알몸으로 가시밭을 뒹굴기도 했다고 전한다.&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수도원 전통에서 성인들은 내면에서 아니마(여성성)와 아니무스(남성성)를 통합함으로써 더욱 인간적이고 인자하고 자유로워진다고 한다. 프란체스코와 베네딕토도 그와 같은 수도자였다는 것이다. 음극과 양극으로 이뤄진 자석의 경우 반쪽을 자르고, 아무리 잘게 쪼개도 그곳에서 다시 음극과 양극이 생긴다. 반쪽을 없애버린 곳에서도 음과 양이 다시 생겨나는 게 자연의 원리인데, 어찌 반쪽이 없는 삶이 가능한 것인가.&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amp;lt;그리스인 조르바&amp;gt;의 저자 카잔차키스는 금욕적 삶에 대해 냉소적이다. 그는 주인공 조르바의 입을 통해 수도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통 친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하나같이 마귀를 품고 사는 것들이 뭐가 답답해 속세로 내려가 원하는 걸 실컷 처먹고 머리를 씻지 못하느냐.”&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지금 전 세계적으로 잇따라 터지는 독신 수도자들의 성추행 사건들은 그의 불경한 대사에 대한 항변을 무색케 만들고 있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불교의 독신 승려들에게도 성욕은 해탈에 이르기까지 뜨거운 감자다. 티베트 불교 일부 탄트라에선 성적 합일을 성불의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성교를 하는 것은 독사의 대가리에 ‘그것’을 집어넣는 것과 같다거나, 음행을 하면서 해탈하려는 것은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다며 경계한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래서 우리나라에선 현대에도 도저히 음욕을 견딜 수 없던 한 승려가 자기의 성기를 잘라버린 경우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이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승려도 있었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이 승려는 음욕이 발동해 도무지 수도에 집중할 수 없자, 작정하고 여자가 있는 술집을 찾아가서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 그런데 그 여자는 그 일대 조직폭력배 두목의 여인이었다. 승려는 낫 두 개를 사 가지고 가 두목을 만났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죽어도 좋을 만큼 이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 여자와 살기로 하지요.”&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렇게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좋다면 어디 한 번 실컷 살아보시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승려의 말에 기가 질린 두목은 혀를 차며 이렇게 말하고 돌아갔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승려는 방에만 틀어 박혀 욕정을 풀었다. 그렇게 석 달을 보냈다.&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이젠 미련이 없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는 선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원 없이 음욕을 발산한 승려가 색욕에 대한 미련을 떨치고 해탈할 수 있으리란 건 너무도 순진한 생각이다. 맛을 보면 볼수록 탐닉하게 되는 게 욕망의 특징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평생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라면, 차라리 직접 경험해본 뒤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게 나을지 모르는 일이다.&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018/175/IMG_5142.JPG&quot; width=&quot;369&quot; height=&quot;546&quot; alt=&quot;IMG_5142.JPG&quot; title=&quot;IMG_5142.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6px; color: rgb(149, 16, 21);&quot;&gt;&amp;lt;그리스인생학교&amp;gt;(조현 지음, 휴) &apos;1장 금욕의 나라, 아토스 산&apos; 중에서&amp;nbsp;&lt;/span&gt;&lt;/b&gt;&lt;/div&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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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term="조현"/>
            <category term="아토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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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스님을 보는 시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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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3-05-12T18:45:56+09:00</published>
      <updated>2013-05-15T07:37:28+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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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법인 스님</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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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div&gt;&lt;b&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 COLOR: rgb(0,117,200)&quot;&gt;화엄만다라 4 -&amp;nbsp;&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 COLOR: rgb(0,117,200)&quot;&gt;초발심 행자에게 띄우는 네 번째 편지&lt;/span&gt;&lt;/b&gt;&lt;/div&gt;
&lt;div&gt;&lt;b&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 COLOR: rgb(0,117,200)&quot;&gt;&lt;br /&gt;&lt;/span&gt;&lt;/b&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gt;&lt;span style=&quot;COLOR: rgb(120,32,185); FONT-SIZE: 16px&quot;&gt;如來十號 여래십호- 이 시대의 승가상&lt;/span&gt;&lt;/b&gt;&lt;/span&gt;&lt;/div&gt;
&lt;div&gt;&lt;br /&gt;&lt;/div&gt;
&lt;div&gt;&lt;br /&gt;&lt;/div&gt;
&lt;div&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886/174/%EC%8A%A4%EB%8B%98%EA%B3%BC%EC%95%84%EC%9D%B4.jpg&quot; width=&quot;546&quot; height=&quot;384&quot; alt=&quot;스님과아이.jpg&quot; title=&quot;스님과아이.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amp;nbsp;&lt;br /&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COLOR: rgb(255,108,0); FONT-SIZE: 12px&quot;&gt;*스님과 신도들. 출처 : 조계사 홈페이지&lt;/span&gt;&lt;/div&gt;
&lt;div&gt;&lt;br /&gt;&lt;/div&gt;
&lt;div&gt;&lt;br /&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지난 4월 23일 몇 분의 스님들이 고등학교 선생님 두 분과 대학교 선생님 한 분을 모시고 그 분들의 말씀을 듣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참석하였습니다. 모임을 연 취지는 ‘생각 있는’ 많은 청년들을 출가수행자의 길로 안내하기 위해서입니다.&amp;nbsp;&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출가수행의 길은 무엇보다도 자신과 세상에 빛이요 감로수로서 의미 있고 성스러운 길입니다. 진정한 삶을 고민하고 제3의 길을 찾는 청년들에게 출가수행자의 길을 안내하는 것도 우리들의 몫일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들을 만나 어떻게 그들을 안내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논해보았습니다.&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먼저 선생님들을 통해서 우리시대의 청년들이 불교와 절, 스님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보았습니다.&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무엇보다 먼저 주어진 문제는, 청소년들이 절과 스님을 ‘무섭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로서는 매우 의아한 일이었지만, 이유는 아주 단순했습니다. 절의 사천왕상과 탱화 등 상징물들이 무섭고, 스님들의 표정은 굳어있어 인자한 모습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amp;nbsp;&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다음 문제는 청소년들이 불교를 매우 ‘어려운’ 종교로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전은 한자투성이라 어렵고, 색즉시공 공즉시색 운운하는 염불도 알아들을 수 없고, 법문은 딴 세상 이야기인 것 같아 낯설기만 하다고 합니다.&amp;nbsp;&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또 스님은 ‘힘들게 사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불교를 믿거나 스님의 길을 가게 되면 죽도록 고생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졸음을 참아내야 하는 철야정진과 장군죽비, 발우공양, 삼천배, 새벽 3시 예불……. 이런 일들 때문에 스님생활은 고생이며, 인간이 누려야 할 욕구와 행복을 포기하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합니다.&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886/174/%EC%82%AC%EC%B2%9C%EC%99%95%EC%83%81.jpg&quot; width=&quot;336&quot; height=&quot;453&quot; alt=&quot;사천왕상.jpg&quot; title=&quot;사천왕상.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br /&gt;&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 COLOR: rgb(255,108,0); FONT-SIZE: 12px&quot;&gt;*무서워보이는 사천왕상&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 자리에서 우리 모두는 망연했습니다. 그들의 인식과 지적이 바로 핵심을 찔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거울에 비친 불교와 절, 스님의 모습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리들 삶의 모습이며, 현세적 업보였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런 생각에 공감하면서도 ‘너희들의 생각은 전적으로 오해야’라고 힘주어 항변하고 싶었습니다. 사천왕과 탱화는 무섭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스님들은 무섭지 않아, 부처님 말씀은 사람들의 고통을 소멸하고 행복과 안락을 주는 가르침이야, 스님의 생활은 쓸데없이 고생스러운 것이 아니고, 밝고 맑으며 의미 있고 보람되고 진짜로 행복한 것이야, 출가수행자가 되면 모든 구속과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고, 하고 싶은 공부도 마음껏 할 수 있고, 자신의 능력을 펼치면서 사회의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 있어 라고 말입니다.&amp;nbsp;&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러나 나의 항변에 그들은 또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amp;nbsp;&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스님, 그런데 왜 저희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amp;nbsp;&lt;/span&gt;&lt;/div&gt;
&lt;div&gt;&lt;br /&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행자님! 이 시대 사람들이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모습’이 우리들이라면, 그들의 지적을 인정하고 문제를 진단해야 합니다. 거울에 비친 우리들 모습은 본래의 승가상에서 너무도 많이 이탈되어 있습니다. 아주 많이 뒤틀리고 꼬이고 일그러진 자화상을 보는 듯합니다. 우리가 항변하고 변명하기보다 오늘의 승가의 역할이 부족하고 편협함을 정직하게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렇다면 행자님! 석가모니 붓다와 그 시대의 승가상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승가상이란 무엇입니까? 출가수행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일까요?&amp;nbsp;&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저는 그 답을 먼저 석가모니 붓다에게 찾고자 합니다. 대중이 붓다에게 부여하고 찬탄한 명호와 능력에서 승가상을 찾고, 붓다의 생애와 역할에서 이 시대의 승가상을 정립해보고자 합니다.&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행자님도 잘 알고 있는 ‘여래 십호’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보면 붓다의 역할과 대중의 요청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붓다는 늘 진리와 함께 하셨고 번뇌와 욕망을 항복 받고 일체로부터 자유로우셨습니다. 지혜와 자비행의 실천자였습니다. 세간의 삶을 잘 이해하고 중생의 고뇌를 해소하여 대중의 스승으로서 공경을 받으셨습니다. 당대의 왜곡된 세계관을 타파하고 연기와 무아의 진리로 대중의 눈을 열어 주셨고, 팔정도의 실천행으로 번뇌와 고통을 소멸하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사성계급의 차별을 부정하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존귀한 존재라고 주장하셨습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는 중재자가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살인마 앙굴리말라를 받아들였고, 똥치는 니이다의 손을 잡아 주셨으며, 외아들을 잃고 비탄에 빠진 키사 고타미의 고뇌를 해소해주었습니다.&amp;nbsp;&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행자님! 이렇게 붓다의 역할을 숙고해보면 붓다는 한 몸을 가진 여러 몸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계정혜 삼학을 구족하고 실천하셨으며, 지혜와 자비를 구족하고 실천하셨으며, 수행과 전법을 함께 하셨습니다.&amp;nbsp;&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러므로 우리가 출가수행자를 정의할 때 단순하게 하나의 명칭으로 정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령 “우리는 수행자이다”, “우리는 도 닦는 사람이다”, “우리는 마음 닦는 사람이다”, “우리는 깨닫기 위해 정진하는 수행자이다”……. 이렇게 승가의 모습과 역할을 한정하고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오늘날 사람들은 스님을 편협한 시각으로밖에 보지 못한 것이 아닐까요.&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리고 행자님! 우리가 오늘의 지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붓다는 승단의 스승을 넘어 세간의 스승으로서 역할을 하고, 세간의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왜 세간의 존경을 받았을까요? 세간 모든 사람에게 눈길을 주고 마음을 열었고 그들의 손을 잡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시대의 승가의 모습과 역할을 결코 절과 승단, 그리고 불교대중의 울타리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amp;nbsp;&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886/174/%EB%8B%AC%EB%A7%88%EA%B0%80%EB%8F%99%EC%AA%BD%EC%9C%BC%EB%A1%9C.jpg&quot; width=&quot;546&quot; height=&quot;400&quot; alt=&quot;달마가동쪽으로.jpg&quot; title=&quot;달마가동쪽으로.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amp;nbsp;&lt;br /&gt;&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 COLOR: rgb(255,108,0); FONT-SIZE: 12px&quot;&gt;*출처:영화 &amp;lt;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amp;gt; 중에서&lt;/span&gt;&lt;/div&gt;
&lt;div&gt;&lt;br /&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몇 해 전 위빠사나 수행자로 널리 이름이 알려진 버마의 고승에게 어느 분이 버마의 군부독재와 그로 인한 국민의 고통에 대해 불교와 수행자의 생각과 역할을 물었습니다. 그 때 버마의 위빠사나 수행지도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수행자는 세간의 일에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매우 혼란했다고 합니다. 행자님도 이 상황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amp;nbsp;&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석가모니 붓다는 세간과 사람들의 문제에 침묵하거나 무관심하지 않았습니다. 문제에 대해 ‘발언’하셨고 ‘답’을 주었으며, ‘대안’을 찾으셨습니다.&amp;nbsp;&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행자님! 승가는 무엇입니까? 붓다의 뜻을 확신하고 따르는 제자들의 무리이지요. 그렇다면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승단을 넘어 세간에 이르기까지 지혜와 자비를 ‘구족’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실천해야 할 몫입니다.&amp;nbsp;&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행자님! 또 다른 측면에서 승가상을 생각해보기로 하지요. 출가자가 실천해야 할 수행의 항목이 무엇입니까? 팔정도, 십바라밀, 사무량심, 사섭법 등이 되겠지요. 한 번 나열해 보기로 하지요? 정견.정사유.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이 팔정도입니다.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반야.방편.원.역.지가 십바라밀입니다. 자.비.희.사가 사무량심입니다. 보시.애어.이행.동사가 사섭법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실천하는 일이 바로 수행입니다. 세상을 연기와 공성으로 보는 정견의 구족과 실천, 일상의 언행을 진리에 합당하게 가져가는 일, 늘 사색하고 성찰하여 존재의 실상을 통찰하는 일, 자신의 변화와 성숙을 위하여 노력하는 일, 비움과 나눔을 실천하는 일, 모든 사회와 역사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일, 대중의 고뇌와 요청에 대해 응답하겠다는 원력과 능력을 갖추는 일, 연민과 자애를 함께 나누는 일 등이 바로 ‘수행’이고 그런 불교적 실천을 하는 사람이 바로 출가수행자이고 승가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886/174/%EA%BD%83%EB%AC%BC%EC%A3%BC%EB%8A%94%EB%8F%99%EC%9E%90%EC%8A%B9%EC%A1%B0%EA%B3%84%EC%82%AC.jpg&quot; width=&quot;546&quot; height=&quot;366&quot; alt=&quot;꽃물주는동자승조계사.jpg&quot; title=&quot;꽃물주는동자승조계사.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br /&gt;&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 COLOR: rgb(255,108,0); FONT-SIZE: 12px&quot;&gt;*식물에 물을 주고 있는 동자승. 출처:조계사 홈페이지&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행자님! 요약하자면 도덕과 윤리의 실천자, 지혜의 구족과 실천자, 사회와 역사에 부응하는 자비의 실천자, 그것이 어느 시대 어느 삶터에서도 구현해야 할 보편적 승가상입니다.&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리고 각각의 시대와 사회의 여건에 따른 승가상이 필요합니다. 기아와 질병과 인권이 유린되는 사회에서는 출가수행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경쟁과 성장의 틀에서 긴장과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산업자본주의시대에는 어떤 역할이 필요할까요? 입시에 시달리고 자살이 늘어가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위로하고 힘을 주어야 할까요? 정보화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다지고 지켜내고 성숙시켜야 할까요? 이 모든 당면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이시대가 요구하는 승가상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lt;/span&gt;&lt;/div&gt;
&lt;div&gt;&lt;br /&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행자님! 지금 행자님은 어떤 모습을 그리고 있고 어떤 역할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석가모니 붓다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초발심의 원력을 다시 새기고 시주의 은덕을 생각하면 우리의 모습과 역할이 보다 분명해지겠습니다.&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
&lt;div&gt;&lt;br /&gt;&lt;/div&gt;
&lt;div&gt;&lt;br /&gt;&lt;/div&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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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왜 사이비 교주에 쉽게 현혹될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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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3-05-09T22:53:48+09:00</published>
      <updated>2013-05-15T07:49:25+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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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휴심정</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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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div&gt;&lt;br /&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홀로서기’가 안 되는 인간은 절대적 의지처를 찾게 된다. 이들을 맹신자로 이용하려는 양쪽의 이해가 잘 맞아떨어지는 대표적인 곳이 사이비성 짙은 유사종교 집단이다.&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span&gt;&amp;nbsp;&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곳엔 놀랍게도 명문대 출신에다 고위공직자, 기업 대표, 간부, 의사, 판사, 검사, 변호사 등 내로라하는 직책의 인물들이 즐비하다. 그럴듯한 인물들을 내세워 종교적 열세를 가려보려는 의도적인 과시 때문에 더 잘 눈에 띄기도 하지만, 실제 그런 사람들도 적지 않다.&amp;nbsp;&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085/173/IMG_8280.JPG&quot; width=&quot;367&quot; height=&quot;546&quot; alt=&quot;IMG_8280.JPG&quot; title=&quot;IMG_8280.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br /&gt;&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이성적 판단 능력이 없는 심리적 허약자가 아니라 멀쩡해 보이는 이들도 광신도 부류에 섞여 있을 때가 있다. 넘어진 적이 없이 안전만을 추구하며 살아왔기에 성인이 되어서도 완벽한 보호를 기대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span&gt;&amp;nbsp;&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사이비 종교에 가면 교주가 자신을 신격화하는 경우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심리적 허약자들이 교주를 완전한 신으로 만든다. 불안하기 그지없는 자신을 온전히 보호해줄 만한 전지전능한 신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룹의 동료들끼리 교주의 위대성을 경쟁적으로 찬양하며 그 찬송에 자신의 믿음이 잘못됐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잠재운다.&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자본주의 속성에 깊게 물든 종교는 현대인들의 불안심리의 틈새를 노리는 데 발 빠르다. 그런 불안을 제거해주겠다는 ‘당근’을 활용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천도제다. 조상이 내 앞길을 막지 않도록 조상을 좋은 곳으로 보내준다는 것이다. 자금력을 과시하는 종교집단의 이면엔 대부분이 고가의 천도제나 굿 같은 종교의식이 있다.&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또한 미신적인 종교일수록 운명론을 확대 재생한하고, 성직을 절대화한다. ‘성직자는 전생에 쌓은 공덕이 많아 대우 받는 게 마땅하고, 천민들은 죄업을 많이 지어 고생을 겪는 것이다. 그러니 성직자와 왕족, 귀족들을 잘 섬기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이런 인과론은 후생을 위해 자신의 삶을 책임 있게 살게 하려는 애초의 의도와 달리 삶의 큰 고통을 겪는 이들이나 장애인들을 더한 고통에 빠트리는 반인권적 업보론이 되기도 한다. 이런 전후생론은, 돈과 권력과 명예가 타인에게 봉사하라고 주어진 것이라는 도덕적 의무론으로 보완되어야 하지 않을까.&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img src=&quot;http://well.hani.co.kr/files/attach/images/71/085/173/IMG_8490.JPG&quot; width=&quot;367&quot; height=&quot;546&quot; alt=&quot;IMG_8490.JPG&quot; title=&quot;IMG_8490.JPG&quot; style=&quot;margin:10px;&quot; /&gt; &lt;br /&gt;&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사람을 섬기기보다는 사람의 영혼을 이용하는 종교가 어느 시대고 활개를 칠 수 있는 건 인간의 연약한 불안 심리 때문이다.&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span&gt;&amp;nbsp;&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사람은 자신의 불안을 제거하고 안전을 찾기 위해 자신과는 다른 능력을 가진 기이한 도인을 찾는 경향이 있다. 나도 방황하던 십대 때부터 이른바 도인이라 불리는 이들을 숱하게 찾아다녔다. 기득권 종교의 영성가와 수행자들까지 많은 이들을 만났다. 하여 나처럼 많은 이를 만나본 이도 없을 것이다.&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br /&gt;&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그러나 수많은 인물을 만나보고 내가 내린 결론은 ‘기이한 곳과 기이한 인물의 이면엔 숱한 사기극은 있을지언정 인간의 도는 없다’는 것이다.&lt;/span&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lt;/span&gt;&amp;nbsp;&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도는 특별하지 않다.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이고 건강하지 않다면 내 영혼을 훔쳐 꼭두각시로 만들기 위한 사냥술일 뿐이다.&amp;nbsp;&lt;/span&gt;&lt;/div&gt;
&lt;div&gt;&lt;br /&gt;&lt;/div&gt;
&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quot;&gt;질병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공포, 실패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완전한 보호막에 들어가고 싶은 갈망과 탐욕도, 인간관계에 대한 집착과 피해의식 그리고 분노도 모두 &apos;생각&apos;에서 나온다. 내가 그리스에 온 것은 이런 생각을 더 굳건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신기루 같은 생각의 실체를 자각해 이런 생각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서다. 습관성 망상에 끌려다니지 않고 의도대로 이 마음을 길들여 잘 쓰며 조화롭게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우리 삶에 더 중요한 도(道)가 있을까.&amp;nbsp;&lt;/span&gt;&lt;/div&gt;
&lt;div&gt;&lt;b&gt;&lt;br /&gt;&lt;/b&gt;&lt;/div&gt;
&lt;div&gt;&lt;b&gt;&lt;br /&gt;&lt;/b&gt;&lt;/div&gt;
&lt;div&gt;&lt;b&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 COLOR: rgb(120,32,185); FONT-SIZE: 16px&quot;&gt;&amp;lt;그리스인생학교&amp;gt;(조현 지음, 휴) &apos;6장 최고의 예언 신전, 델포이&apos; 중에서 &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 COLOR: rgb(120,32,185); FONT-SIZE: 16px&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Dotum; COLOR: rgb(120,32,185); FONT-SIZE: 16px&quot;&gt;&amp;nbsp;&lt;/span&gt;&lt;/b&gt;&lt;/div&gt;
&lt;div&gt;&lt;br /&gt;&lt;/div&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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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term="사이비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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